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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그 많던 뉴욕의 한인 갱단원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 임종규 • 윤병진 기자
  • 등록 2024-09-12 1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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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대표적 한인 갱단 KP(Korean Power) 비롯 10여개 갱단 전직 단원들은 이제 중장년층에 접어들어 ••• 중국계 갱단과 달리 매달 업소 보호비 받아가면서 사건 터지면 나몰라라

 


 

미국 게임에까지 등장한 한인 갱단원의 죽음. 게임회사에서는 사진설명으로 1988년생 한인 갱단원 Y가 2008년 뉴욕시 퀸즈 아스토리아 파크에서 마약 거래를 하다가 타민족 갱단원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고 적어놨다. 이 사건은 가상이지만 이와 유사한 사건은 뉴욕에서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한모 씨의 사망과 함께 뉴욕 한인 1세대 갱단 조직은 모두 문 닫아


배트맨(Batman) 영화에 등장하는 범죄도시 고담시(Gotham City)’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그만큼 뉴욕은 오랫동안 무법천지이던 시절이 있었다이탈리아계 갱단 마피아가 설치고중국계베트남계 갱단이 날뛰며 마구잡이 총질을 해대던 나날이었다. 흑인이나 라티노(히스패닉갱단은 힘도 못 쓰던 시절이었다


여기에다 한인(코리안갱단까지 가세해 동족 상인들을 위협하며 금품을 갈취하던 세월이었다마피아나 중국계 갱단의 역사는 워낙 오래되고 유명해 영화나 TV드라마 등으로 많이 다뤄졌지만 한인 갱단의 얘기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유는 미주한인 언론들이 직무유기를 한 탓도 있지만언론인들이나 동포들이 갱단의 보복이 두려워 입을 다문 탓이 크다기자 역시 과거 한인 갱단을 취재하다 협박을 받고 총을 맞을 뻔한 일이 몇 번 있었다


기자가 안 좋은 기억에도 불구하고 이번 취재를 한 까닭은 부끄러운 역사도 미주한인사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한인사회의 역사에는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코리안의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을 등쳐먹고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동족들에게 총을 겨누는 어글리 코리안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기록해둬야 하지 않을까.


뉴욕이나 LA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주한인 갱단들은 겨우 사시미 칼이나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한국의 조직폭력배와는 차원이 다르다그들은 권총은 물론이고 자동소총 등 경찰의 화력과 맞먹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집단이다


뉴욕 한인갱단의 역사는 이민 1세와 1.5세로 나눌 수 있다1세 갱단원들은 주로 한국에서 건너온 30, 40대 폭력배로서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동족들을 괴롭히거나 각종 이권(利權)에 개입했다반면 10, 20대로 구성된 1.5세 갱단은 80년대 초에 등장, 2000년대 초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다


1세와 1.5세 갱단들의 활동기간은 겹치는 부분이 있었지만 서로 활동영역이 달라 특별히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1.5세 갱단은 한국인 특유의 유교문화 덕분으로 1세 갱단을 깍듯이 어른 대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세 갱단의 막내가 1.5세 갱단의 두목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당시 기자가 만났던 1세 갱단의 막내가 1957년생이었던 반면 1.5세 갱단의 두목이 1970년생이었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컸다


또한 1세 갱단들은 주로 한인 이민 1세들을 상대로 이권다툼보호비 갈취 등의 나쁜 짓을 했지만 영어권인 1.5세 갱단원들은 한인은 물론이고 타민족들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이들이 고리대금업은 물론이고 마약밀매매춘살인강도 등의 강력범죄에 많이 연루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올드 타이머들 입에 오르는 1세 갱단의 대표적 인물로는 김모문모한모 씨 등이 있다현재 80대의 김모 씨는 아직 생존해 있지만 문모 씨는 지난 2002년 간암으로 인해 5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그가 생존해 있었다면 올해 77세였을 것이다.


젊은 시절 항상 권총을 차고 다니던 문 씨는 갱단 활동을 손 씻고 사업을 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모 향우회 회장까지 지냈다이들보다 후배인 한모(1952년생)씨 역시 2000년대 초반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 씨는 1990년대 중반 퀸즈 루즈벨트 애브뉴 선상의 모든 유흥업소에 주류를 공급하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당시 그는 이를 시샘하던 중국 갱단과의 충돌도 불사(不辭)했다중국 갱단과의 주류 공급권을 두고 벌인 협상 장소(퀸즈 노던블러바드 108가 소재 N 나이트클럽)에 우연히 기자가 있었기에 기자는 한 씨의 대담성을 잘 목격 할 수 있었다


당시 양측 조직원 수십명은 자동소총을 서로 겨눈 채 협상에 임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 였다결국 이 협상으로 인해 한 씨는 주류 공급권을 중국갱단에게 일부 양보하며 그들과의 공생을 택했지만 중국갱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됐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활동했던 뉴욕의 1세대 한인 갱단은 한국에서 온 30∼40대가 주류를 이뤘다. 사진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한 장면.



맨해튼 32가 한인타운에서 상대 조직원과의 총싸움도 마다하지 않던 그가 몰락한 계기는 한인언론의 오보(誤報)에서 비롯됐다C일보의 P기자는 한 씨가 한국에 가 뉴욕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대 조직원을 살해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살인은 한 씨 밑에 있던 중간보스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이 일로 인해 경찰은 한 씨를 추적했고 그는 도망 다니느라 이권사업에 집중 할 여력이 없었다당시 한 씨는 분한 마음에 오보를 낸 P기자를 죽이려고 권총을 소지한 부하들을 시켜 P기자를 몇 개월 동안 미행한 적이 있었다


그는 P기자의 거주지는 물론이고 가족관계까지 꿰뚫고 있었다당시 이 사실을 알게 된 기자는 한 씨를 만나 설득을 한 적이 있었다. “언론인을 죽이면 당신은 가중처벌을 받을 것이다평생 감옥에서 썩고 싶냐?” 기자의 설득에 그는 억울함 때문인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뉴욕을 떠난 한 씨는 뉴저지 한인타운에서 동업으로 유흥업소를 운영하며 재기(?)를 모색했다. 하지만 이미 한인 갱단 세계의 주류가 1.5세로 바뀐 뒤라 마음처럼 싶지 않았다


결국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던 그는 신용카드 사기 범죄에 가담했다가 뉴저지 포트리 경찰에 체포가 됐다한 씨는 버겐카운티 구치소 수감 중 간암말기 판정을 받고 석방됐으나 수개월 후 사망했다그가 살아있었다면 올해 72세가 됐을 것이다한 씨의 사망을 끝으로 뉴욕의 1세대 한인 갱단 세계는 문을 닫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폭력혐의로 교도소를 두 번 다녀 온 적이 있다는 1세대 갱단 (68‧플러싱 거주)젊은 시절의 철없던 행동이 후회 된다면서 당시 함께 활동하던 조직원들과는 연락을 끊고 지낸다고 말했다


씨는 당시 우리는 1.5세 갱단들과는 달리 조직의 이름도 없이 친분관계로 맺어져 있었다다른 조직과 다르게 우리는 동족 업소들에게 보호비를 받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지금은 교회 안수집사로 재임 중이라는 씨는 “1세대 두목들과 조직원들이 이제는 모두 60대 중후반부터 80대 초중반에 이르는 노년층에 접어들었다“한 때 우리의 잘 못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동포들이 있다면 늦게나마 용서를 빈다고 덧붙였다.


 

       갱단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는 뉴욕시 경찰의 모습.

     



KP 등 1.5세 한인 갱단 조직원만 5백명 넘어 이들과 직간접으로 연계된 한인 청년은 3천명이나 돼 

 

뉴욕의 1세대 한인갱단들이 조직명 조차 없이 활동을 한 반면 80년대부터 등장한 1.5세 갱단들은 조직의 이름부터 살벌하고 화려했다대표적인 한인갱단은 조직원 1백여명을 자랑했던 ‘KP(Korean Power)’였다. 


KP는 뉴욕 한인사회 최대규모의 갱단이었다이들의 주 수입원은 ▲한인업소들을 상대로 한 보호비 명목의 금품갈취 ▲한인 불법 맛사지 팔러(매춘업소)를 대상으로 한 매춘여성 조달 ▲마약밀매 ▲고리대금업 ▲밀입국 알선 ▲도박 등이었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권다툼에 있어 살인과 폭행을 서슴지 않는 잔인성을 보이기도 했다조직원의 나이는 10대 말부터 20대 초반이며 두목 또는 부두목급이 20대 중후반이었다한참 불물 안 가릴 나이였다


KP 외에도 뉴욕에서 활동한 한인갱단은 도끼파, 24K(24 Korean), 주니어 코리안 파워(JKP), 브루클린 킬러(Brooklyn Killer), 블랙 스타(Black Star), 제이제이(JJ), KF(Korean Fuching), KFD(Korean Flying Dragon), KGD(Korean Green Dragon), KTB(Korean Taiwanese Boys)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KF, KFD, KGD, KTB는 한중 합작 갱단이었다중국갱단인 훅칭’, ‘비룡파’, ‘청룡파’, '타이완니스 보이스'의 산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인 갱단과 친분관계를 맺던 여고생 갱단 리틀엔젤스도 퀸즈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리틀엔젤스는 동료 학생들을 상대로 금품을 갈취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일부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이권 정보를 남성 갱단에 전하는 등 그들과 끈끈한 협력관계를 맺기도 했다.


리틀엔젤스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다는 당시 학부모 B(64)씨는 조직원들 중에 한국에서 이민 온지 얼마 안 되는 여학생들이 상당수라 영어를 잘 못하는 상태에서 끼리끼리 어울려 다녔다“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여학생들이 순진한 면이 많아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다고 전했다


씨는 리틀앤젤스 아이들은 친분관계에 있던 남자 갱단원들을 믿고 더욱 설친 경향이 있다세월이 흘러 이제는 리틀엔젤스 조직원 여학생들도 40∼50대 나이가 됐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맨해튼 32가 코리아타운(위 사진)과 퀸즈 플러싱의 한인 상가 모습. 한인 갱단들은 이 곳에서 매달 업소 보호비를 받아가면서 정작 사건이 발생하면 '나몰라라' 했다. 



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20년 동안은 1.5세 한인 갱단의 전성시대였다겁 없는 나이의 이들은 1세대 갱단에 비해 무기사용에 무자비했다이들이 다양한 강력사건에 연루되다보니 경찰의 추격도 집요했다


뉴욕시경(NYPD) 형사 출신 한인 (60)당시 우리가 파악한 한인 갱단 조직원 수는 5백명이 넘었으며 3천명의 한인 젊은이가 이들과 음으로 양으로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씨는 “2000년대 초반까지 1백명이 넘는 한인 갱단원이 뉴욕뉴저지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정도 였다면서 범죄행위가 잔혹한 경우가 상당수였다고 전했다


뉴욕의 한인 변호사 (70)당시 내가 한인 청소년들과 관련해 수임한 사건만 1천건이 넘는다”며 이 가운데 50% 이상이 갱단과 관련한 경우였다고 밝혔다.


씨는 범죄행위를 벌인 자식을 앞에 둔 한인 부모들의 애절한 모습과 울음소리가 아직도 눈앞과 귓가에 생생하다”면서 심지어 유명 목사의 자녀도 강도를 저지를 정도로 당시는 한인사회가 혼돈의 시기였다고 전했다


당시 한인 갱단들은 맨해튼과 플러싱 한인타운 업소마다 찾아다니며 보호비 명목으로 월 2백∼3백 달러를 받아 챙겼다신규업소에서는 개업기념으로 2천∼3천 달러를 받기도 했다이는 차이나타운 중국 갱들이 기존업소에서 다달이 3백∼5백 달러를 받고새롭게 개업하는 업소에서는 보호비 명목으로 최초 3천 달러를 받는 것을 본받은 것이었다


한인 갱단들은 업소들이 보호비를 안주면 기물을 파손 하는 등 영업을 방해했다다만 1세대 한인갱단에 보호비를 상납하는 업소는 건들지 않았다앞서도 언급했지만 1.5세 갱단원들은 1세대 갱단원들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한국식 유교사상과 선후배문화 및 장유유서(長幼有序)가 갱단 세계에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뉴욕이나 LA나 한인 갱단들은 비겁했다 ... LA 폭동때도 중국갱단 비웃음 사


각종 범죄를 저지르며 활개를 치던 한인 갱단들에게도 서서히 몰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피아를 때려 잡던 연방검사 출신 루돌프 줄리아니(Rudy Giuliani)가 뉴욕시의 107대 시장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줄리아니 시장은 취임 즉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연방수사국(FBI)과 함께 마피아와 중국 갱단들 소탕작전에 나섰다줄리아니 시장은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 8년 동안 각종 갱단을 거의 괴멸수준으로 몰고 갔다.


마피아와 중국갱단들이 몰락의 길을 걷자 중국갱단의 하부조직이자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한인갱단의 존재 역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줄리아니 시장은 갱단의 뒤를 봐주던 부패경찰 척결에도 앞장 섰다뉴욕시경내 갱단 관련부서를 물갈이 하는 한편 맨해튼 차이나타운과 퀸즈 플러싱 관할 경찰서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을 실시일부 부패경찰의 옷을 벗겼다. 여기에는 한인경찰도 포함됐다.



1985년 연방검사로 근무할 당시의 루디 줄리아니 뉴욕시장(오른쪽). 당시 줄리아니 검사가 윌리암 웹스터 연방수사국(FBI) 국장과 함께 마피아 소탕작전 후 기소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1994년 뉴욕시장에 취임한 이후에도 꾸준하게 갱단 소탕작전을 진두 지휘했다. 



이 무렵 KP는 일본 야쿠자와 손잡고 마약 밀매에도 열심이었다당시 야쿠자에는 한국계 조직원들의 모임인 동아회(옛 동성회)가 있었다. KP는 이들과 함께 국제적으로 마약밀매 사업에도 뛰어들었던 것이었다이러던 와중 한인 갱단의 대표주자 KP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지난 20007맨해튼 32가 한인타운에 위치한 대통령’ 룸살롱 업주가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경찰 수사결과 피해업주는 술값을 안주고 도주하려는 한인청년과 실랑이를 벌이다 그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모든 언론이 다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이 사건은 맨해튼에서 영업하던 한인 룸살롱들이 사라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경찰이 언론에는 밝히지 않았지만 룸살롱에서 총을 쏜 범인은 KP 조직원인 것으로 드러났다뉴욕시경은 이 사건을 계기로 KP 조직원 및 여타 한인 갱단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나섰다


결국 뉴욕의 KP 등 한인갱단들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갱단이나 LA, 버지니아애틀랜타 등의 한인 갱단들과 달리 소멸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이에 대해 형사 출신 씨는 이 사건 이후 대대적인 한인 갱단 소탕작전이 벌어져 지금은 한인 갱단이 거의 사라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중국 갱단에 비해 한인 갱단이 손쉽게 없어진 것은 또 따른 이유가 있다


갱단 조직원이 풀타임’ 직업인 중국 갱단원들과 달리 한인 갱단원들 상당수는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파트 타임’ 조직원이었다또한 자녀들에 대한 극성스런 교육열과 유교사상을 주입시킨 한인부모들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말했다.


전직 KP 조직원 (50)당시 한인 갱단들이 중국갱단들처럼 큰 규모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은 한국인 특유의 '똑똑함' 때문 이었다각자가 잘난 맛에 살다보니 뭉치지 못했으며, 부모들의 영향으로 탈퇴하는 조직원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씨는 본지에 이렇게 덧붙였다심지어 한인 언론사 기자로 취직한 조직원도 있었고지금 뉴욕한인회에서 주요 직책을 갖고 있는 선배 조직원도 있다어떤 조직원은 정치인 보좌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상당수 조직원이 전문적인’ 중국 갱들과는 달리 젊은 시절의 일탈로 자신의 갱단 생활을 치부(恥部)하는 것 같았다


감옥을 들락거릴 정도의 프로페셔널한 조직원들은 전체의 20%도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중국계 갱단 처럼 조직을 탈퇴하면 뉴욕을 떠나야만 하고안 떠나면 무자비하게 복수를 하는 규율을 만들었다면 아마 아무도 갱단원을 안 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아마추어프로도 아닌 세미프로’ 정도였다고나 할까이제는 1.5세 한인 갱단원들 상당수가 가정을 꾸리고 중년의 나이가 됐으니 아마 철이 들었을 것이다


맨해튼 한인타운과 플러싱에서 20년 넘게 업소를 운영한 적이 있다는 70대의 F씨는 당시의 한인 갱단원들은 한마디로 나쁜 범죄자들이었다세월이 흘렀다고 절대로 이들을 미화하거나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씨는 “보호비를 받는 업소에서 문제가 생기면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중국 갱단들과 달리 한인 갱단들은 항상 나몰라라’ 했다”면서 한마디로 한인 갱단들은 비겁하고돈만 밝히는 조직이었다고 비난했다.



           지난 2020년 버지니아에서 살인 및 마약 밀매혐의로 기소된 한인 갱단원들.


                    LA에서 강도혐의로 경찰에 의해 공개수배된 한인 갱단원들.



씨와 비슷한 증언은 LA의 한 전직 언론인으로 부터도 들었다LA 한인 일간지 기자출신인 60대의 김모 씨는 본지에 이런 말을 들려줬다


“1992LA 폭동당시 코리아타운에서 보호비를 뜯어가던 한인 갱단들은 폭동이 터지자 모두들 업소를 외면했다이로 인해 한인 갱단들은 중국 갱단들의 비웃음을 샀다오히려 중국갱단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보호비를 주면 우리가 폭도들로부터 업소를 보호해 주겠다고 제안한 사실이 있을 정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인 갱단들은 중국 갱단들에 비해 의리도 없고 신용도 없다미국내 중국 갱단들이 나름대로 규율을 지키며 명맥을 유지하는 반면 한인 갱단들은 오로지 이권에만 개입하는 경향이 있다


LA에도 뉴욕과 같은 약칭의 KP라는 조직이 있다다만 '코리안 파워(Korean Power)'가 아니라 '코리안 프라이드(Korean Pride)'로 영문명이 다를 뿐이다가수 유승준이 과거 이 조직의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LA도 뉴욕처럼 한인 갱단들이 사라질 날이 조속히 오길 기대해 본다


뉴욕의 전직 갱단원 알렉스 강(46‧가명)씨는 나는 부모의 간절한 설득과 호소로 24세에 갱단을 탈퇴한 경우라면서 이후 2년제 커뮤니티칼리지를 마치고 미군에 입대해 4년제 대학과정을 졸업했으며 대학원 과정도 마쳤다고 전했다


현재 투자회사에 근무 중이라는 강 씨는 인종차별과 미국생활의 외로움이 한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를 나쁜 길로 빠지게 했다당시 부모는 흑인동네에서 장사를 하느라 나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지금 뉴욕에서 조직적인 한인 범죄는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독자적인 한인 청년 및 소년 범죄는 줄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


결국 부모와 사회의 관심만이 한인 청소년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본다어린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주민이 동원돼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인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는 나처럼 어린 시절을 나쁜 짓하며 보내는 한인 청소년들이 없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임종규 선임기자 • 윤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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