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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유우파(보수)는 어떻게 부활했나
  • 조평세 박사
  • 등록 2024-05-02 12:27:04
  • 수정 2024-05-05 01:4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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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대한민국의 우파가 본 받아야 할 미국의 사례 ••• 1964년 골드워터 참패 속에서 레이건 발굴, ‘보수혁명’ 성공




1964년 배리 골드워터(왼쪽)의 LA 유세에서 지원 연설을 하는 로널드 레이건. 골드워터는 그해 대선에서 참패했지만, 레이건은 보수 정치인으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1964년 11월, 애리조나 출신의 공화당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는 민주당 후보 린든 존슨에게 비참하게 패배한다. 존슨은 44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승리한 반면, 골드워터는 6개 주에서 승리하는 데 그쳤다. 확보한 선거인단 수는 존슨이 486명, 골드워터는 52명에 불과했다. 득표율로 봐도 존슨은 61.1%, 골드워터는 38.5%였다. 민주당에 역대 최고의 득표율을 안겨준 기록적인 참패였다.

하지만 역사는 골드워터를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미친 패배자(the most consequential loser)’로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골드워터의 패배는 16년 후 공화당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당선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명한 정치 시사평론가 조지 윌(George Will)은 위트 있게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골드워터는 (사실상) 1964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단지 표를 세는 데 16년이 걸렸을 뿐이다.” 골드워터에서 레이건까지, 즉 보수(保守)의 참패에서 보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기까지 16년 동안 미국 보수는 무엇을 했을까? 유럽의 68혁명과 맞물린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히피 ‘반문화(counter-culture)’ 물결을 그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그리고 대한민국 보수는 과연 이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현실 직시와 희망

미국 보수 진영이 어떻게 그 16년의 힘겨운 세월을 묵묵히 견뎌내며 보수의 재건을 치열하게 일궈낼 수 있었는지는, 당시 보수주의 운동을 견인한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다. 버클리는 1964년 9월,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두고 열린 유세 현장에서 갑자기 집회를 비공개로 바꾸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곧 닥칠 골드워터의 패배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참패 이후 극심한 혼란이 뒤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 패배는 어느 위대한 ‘11월의 그날’로 열매 맺을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뜨거운 유세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지만, 1년 전 암살당한 존 F. 케네디에 대한 동정 여론과 온갖 더러운 흑색선전으로 선거운동을 펼치던 린든 존슨을 이길 수 없다는 냉철한 판단이었다. 버클리의 ‘예방접종’은 대선 패배 후 미국 보수 진영이 신속히 절망을 털고 일어나 본격적인 보수주의 운동에 돌입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11월의 그날’을 착실히 준비하게 했다.

사실 1964년 골드워터가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기 4년 전 미국 보수 진영에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최초의 보수주의 행동조직이 결성된 것이다. 당시는 베스트셀러 《보수주의자의 양심》(1960)을 써내며 ‘원칙 있는 보수’로 이름을 날렸던 골드워터가 공화당 경선에서 탈락하고, 공산주의와의 투쟁에 뜨뜻미지근했던 공화당을 진정한 보수 정당으로 탈환하는 데 실패한 때였다. 그는 경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료 보수주의자 여러분, 우리가 공화당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바로 그 일에 착수합시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支柱) 역할을 했던 윌리엄 버클리에게 젊은 보수주의자들을 조직할 것을 주문한다.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탄생일’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의 저택에서 열린 YAF 첫 모임 장면을 담은 YAF 창립 60주년 기념 포스터.

 
1950년대부터 러셀 커크와 버클리 등을 통해 조금씩 지적(知的)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미국의 젊은 보수주의자들은 골드워터의 ‘소집 명령’에 따라, 1960년 9월 11일 코네티컷 샤론(Sharon)에 위치한 버클리의 저택에 모여든다. 미국 24개 주 44개 대학에서 모인 90명의 대학생과 청년들이었다.

모두 버클리가 5년 전 창간한 《내셔널리뷰》의 애독자들이었고, 대학가에서 각자 보수주의 공부 모임을 이끌던 증명된 보수주의 리더들이었다. 그들은 샤론에서 보수주의의 원칙과 청년운동 조직화 방안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자유를 위한 미국 청년들(Young Americans for Freedom·YAF)’이라는 정치 행동 조직을 결성한다.

YAF는 2년이 채 안 된 1962년 3월 8일,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반공(反共) 보수주의 집회에 1만8천명의 청년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많은 역사학자는 이날을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탄생일’로 기록한다. 이 운동력은 2년 후 골드워터 보수주의자들의 공화당 바로 세우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YAF가 당시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버클리와 커크 등의 보수주의 사상가들이 차곡차곡 쌓아놓은 텍스트였다. 《내셔널리뷰》를 비롯한 보수주의 정론지와 각 대학의 보수주의 및 고전 자유주의 공부 모임 등으로 농축되어 임계점(臨界點)에 달했던 에너지는 YAF를 통해 분출되었다.

특히 당시 이들이 채택하고 발표한 YAF의 창립선언문이자 보수주의 사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샤론선언문(Sharon Statement)〉은, 현재까지도 미국의 보수주의 정신을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기념비적인 명문(名文)으로 여겨진다.

당시 26세 청년이자 주요 일간지(《인디애나폴리스 뉴스》)의 전국 최연소 편집장이었던 M. 스탠튼 에반스가 초안을 작성했다. 이 짧은 문건에는 보수주의의 원칙과 고전적 자유주의 및 시장경제의 원리, 그리고 보수의 마땅한 대외 정책 기조까지 담겨 있다. 샤론선언문의 국문(國文) 번역은 아래와 같다.


샤론선언문

 도덕적·정치적 위기의 시기에 미국의 젊은이들은, 다음의 몇 가지 영구불변한 진리들을 재확언(再確言)해야 할 시대적 책임을 진다.

우리 젊은 보수주의자들은,

1. 인간 상위의 초월적 가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신(神)이 부여하고 그 어떤 인위적 강제력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가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 자유는 양도할 수 없다는 것과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 없이 오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2. 또한 정부의 목적은 내부 질서와 국방, 그리고 정의(正義)의 집행을 통해 이 자유를 지키는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정부가 이 최소한의 기능 이상의 역할을 감행하려 할 때, 질서와 자유를 감소시키는 경향을 가진 권력을 축적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3. 미국의 헌법은, 정부가 그 적법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줌과 동시에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최선의 정부 구성임을 믿는다. 권력분립이라는 헌법의 진수는, 연방정부에 명시적으로 위임된 영역 외에는 각 주(州), 혹은 각 국민에게 우선권을 보장하는 원칙에 있음을 믿는다.

4. 또한 공급과 수요의 자유로운 균형원리를 통해 자원을 배분하는 시장경제는, 자유로운 개인의 요구와 입헌(立憲)정치에 가장 적합한 경제체계라는 것과 동시에 이것이 인간 필요를 가장 잘 충족하는 생산적인 공급자라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정부가 시장경제의 원리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경우, 그것이 국민의 도덕적·물리적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다. 가령 정부가 어느 한 사람의 것을 뺏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경우, 그것은 첫 번째 사람의 인센티브와 두 번째 사람의 정직성, 그리고 두 사람 모두의 도덕적 자율(moral autonomy)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믿는다.

5. 또한 미국의 국가주권이 보장되어야만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과… 자유의 적(敵)으로부터 스스로의 권리를 수호하려는 국민들이 함께 협력해야 자유를 유지할 수 있음을 믿는다.

6. 그리고 현재 이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국제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과의 공존을 추구하기보다 그 위협에 대한 승리를 강조해야 함을 믿는다.

7. 그리고 미국의 모든 외교 정책은 ‘그것이 미국에 정당한 이익을 제공하는가?’라는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샤론선언문이 아우르는 지적 흐름은 세 가지다. 바로 개인의 자유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보수주의와 자생적 시장경제를 최상의 공급자로 보는 자유주의, 그리고 두 사상이 공통의 적(공산주의)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공주의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전 자유주의의 거장인 하이에크가 어떻게 미국 보수주의 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종종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와 같은 전체주의(全體主義)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두 지적 흐름이 반드시 연합된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함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커크와 하이에크의 토론



              러셀 커크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1957년 하이에크는 그가 회장으로 있던 고전(古典)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몽페를랭 소사이어티에서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비공개 논문이었지만 당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반격을 꿈꾸고 있던 미국 보수 진영은 이에 당황했다. 

《보수의 정신》(1953)으로 보수주의의 사상적 줄기를 재정립했던 러셀 커크가 하이에크에게 급히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곧 몽페를랭 소사이어티에서 커크를 토론장으로 초청했고, 그렇게 ‘20세기 비(非)좌익 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토론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하이에크-커크 논쟁’이 열리게 된다.

하이에크는 보수주의를 반지성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면서 인간 상위의 도덕적 권위에 호소하여 항상 최후의 발언을 차지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커크는 자유주의가 인류 역사의 경험적 교훈을 등한시하며 자유시장을 과하게 신봉해 (불가능한) 인간의 완벽성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보수주의’를 각자 다르게 이해(理解)하고 있는 데 있었다. 하이에크는 권위와 전통 자체의 보전을 추구하는 유럽식 보수주의를 비판하고 있었다. 커크는 권위와 전통 그 자체보다 그것을 있게 한 불변의 질서에 중점을 두었던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 즉 미국 혁명이 뿌리내린 유대기독교(서구) 자유문명의 보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실제로 하이에크는 자신의 에세이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에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보수주의와 그 속에 내재된 ‘민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유럽식 보수주의와 전혀 반대되는 고전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하이에크는 사실상 “나는 왜 ‘유러피언’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를 주장했던 것이다.


‘보수주의 빅 텐트’ 형성


                    YAF 운동은 오늘까지도 미국 보수주의 청년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스위스 몽페를랭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3년 후 미국에서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많은 이견(異見)과 대립이 누그러져 있었다. 1960년 커크와 하이에크를 포함한 14명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시카고 모리슨 호텔에 모여 주말 내내 열띤 토론을 가졌다. 두 진영의 연합을 도모했던 프랭크 메이어와 스탠튼 에반스가 회합을 중재했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큰 정부에 반대했고 개인의 자유를 중시했으며 고전 자유주의 사상에 공감했다. 

또한 개인의 자유가 자칫 방종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공감하면서, 단지 이것이 도덕적 차원의 문제이지 어떤 체제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다. 우려와 달리 하이에크도 자연권의 존재와 인간 상위 질서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같은 해 하이에크는 그의 《자유헌정론》(1960) 말미에 그의 에세이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를 삽입해 출간했는데,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글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심지어 프랭크 메이어가 《보수주의란 무엇인가》(1964)라는 책을 펴내면서 하이에크의 에세이도 포함시켰다(이 책은 최근 한국어로 《보수의 뿌리》라는 제목을 달고 출판됐다). 버클리의 《내셔널리뷰》는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20세기 100대 위대한 논픽션 단행본’ 중 9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보수주의 빅 텐트(big tent)’가 펼쳐진 것이다. 메이어의 ‘융합주의(fusionism)’라고도 알려진 이 지적 연대(連帶)는,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슬로건 아래 폭주했던 사회주의적 거대 국가 팽창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분명한 통일전선을 제공했다. 이는 대한민국 보수 진영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CPAC 참가자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 신규 참가자


                 2020 CPAC 행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동시에 이들은 ‘빅 텐트’ 안에서도 각자의 지적 흐름을 끊지 않고 개별적인 성장과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재 미국 보수 정치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싱크탱크의 설립이 이를 잘 나타낸다. 대표적으로 허드슨연구소(1961년), 미국기업연구소(AEI·1962년), 헤리티지재단(1973년), 케이토연구소(1977년), 리더십연구소(1979년), 아틀라스 네트워크(1981년)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지적 기반이 형성되고 있는 가운데 1964년 공화당의 대선 패배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집단행동, 즉 미국보수연합(American Conservative Union·ACU)의 창립을 촉진했다. 개인의 자유와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것을 주 정치적 목표로 삼은 ACU는, 최근까지도 미국 보수 진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보수주의 로비 단체다.

10년 후인 1974년 ACU는 YAF와 함께 첫 대규모 보수주의정치행동집회(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CPAC)를 개최하는데, 이후 CPAC은 세계 최대의 연례(年例) 보수주의 행사로 성장했다. 약 3박 4일 동안 워싱턴DC 인근의 호텔에 1만여 명의 보수주의 활동가들이 모여 촘촘히 짜인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정치 훈련을 받고 행동전략을 공유하는 행사다.

연단에는 공화당 대통령과 부통령을 포함한 전·현직 정치인들과 보수단체 대표 등 약 100명의 연사들이 섭외되고, 수백여 개의 단체와 기업이 홍보와 협찬을 통해 자금을 제공한다. 차기 공화당 대선(大選) 주자들도 종종 여기서 발굴된다. 도널드 트럼프, 마이크 펜스 등도 사실상 모두 CPAC에서 발굴되어 대선 주자로 키워진 바 있다.

필자가 미국에 있는 동안 참석한 세 차례의 CPAC 행사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미국 전역에서 모인 1만 명 이상의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의 신규 회원이라는 사실이다. 제대로 제시된 보수주의의 매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청년들에게 따로 제공되는 세션 주제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었다. 가령 ‘매력적인 보수주의 동아리 운영하기’ ‘메일링 리스트 관리하기’ ‘효과적인 글쓰기 및 캠퍼스 잡지 창간하기’ ‘화내지 않고 좌파들과 대화하기’ 등의 실질적 도움이 되는 주제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레이건의 등장


                   레이건 대통령은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의 《내셔널리뷰》의 영향을 받아 확고한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보수 재건 16년’ 동안 가장 큰 성과는 단연 로널드 레이건의 발견과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의 《내셔널리뷰》를 통해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거듭난 레이건은, 1964년 10월 골드워터의 유세 현장에서 미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연설을 남긴다. 바로 ‘선택의 시간(A Time for Choosing)’으로 잘 알려진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레이건은 미국에 주어진 선택지가 더 이상 좌우 따위가 아니라 ‘위아래’임을 역설한다. 개인의 자유라는 최상의 높은 길과 전체주의라는 최하의 바닥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설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에서는 “‘평화냐 전쟁이냐’라는 기만적 말장난이 아니라, 공격하는 적에 맞서 ‘싸우느냐 항복하느냐’를 선택하는 ‘운명과의 조우(遭遇)’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골드워터의 찬조연설에 불과했던 이 연설은 곧 보수주의 정치인 레이건의 출발을 알렸다. 과거 민주당원이었던 레이건의 호소는 훗날 ‘레이건 민주당원’이라고 여겨지는 수많은 민주당 지지층을 보수주의 공화당으로 이끌어냈다. 이듬해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출마해 압승을 거뒀을 때 무려 40만 명의 민주당원이 탈당해 레이건에게 표를 던졌다. 이때부터 미국 보수 진영은 레이건의 매력을 알아보고 일찍이 그를 공화당의 비밀병기로 낙점하여 키워냈다.


‘도덕적 다수’

로널드 레이건의 성장 배경에는 무엇보다 도덕적 중추 역할을 했던 보수 기독교인들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전통적 가치와 도덕적 권위를 무시하고 방종과 타락을 부추기는 소위 ‘68혁명’과 히피 반(反)문화에 맞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먼저 일어나 ‘도덕적 양심의 회복’을 외쳤다.

특히 1973년 낙태를 사실상 전면 합법화하는 ‘로 대(對) 웨이드(Roe vs. Wade)’ 대법원 판결로 인해 ‘프로라이프[친(親)생명, 반(反)낙태]’를 단일 어젠다로 삼은 생명운동이 1974년부터 전국적으로 발동되어 세력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작되어 지금도 50년째 워싱턴DC에서 매년 열리고 있는 ‘생명행진(March for Life)’은 결국 2022년 대법원이 낙태 합법화 판결을 뒤집게 하는 역사적인 결과를 끌어냈다.

또한 기독교 가치관을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정책 연구·로비 조직들도 생겨났다. 1976년에는 ‘유대기독교 전통을 정치와 법과 문화에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윤리와 공공정책 연구센터(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가 개소했다. 1977년에는 서던캘리포니아 의대 교수였던 제임스 돕슨이 자녀 체벌권, 남녀 상호보완주의, 반동성애 등의 전통적 가족 가치를 내세우는 ‘포커스온더패밀리(Focus on the Family)’를 창립했다. 이후 돕슨은 가정 친화적 정책을 만들어 정치권에 제시하는 ‘가족연구회의(Family Research Council)’를 설립해 워싱턴 정계를 압박했다.

당시 대학가의 좌경화(左傾化)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존 기독 명문대였던 힐스데일대학, 그로브시티대학 등의 이사진에 적극 합류하여 대학의 좌경화를 막아냈다. 이 중 일부는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기독교인의 정치 세력화와 기독 유권자 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침례교 목사 제리 폴웰은 1971년 리버티대학을 설립했다. 가장 최근에는 홈스쿨링 및 가정 보호 운동과 기독법률지원단체인 ‘자유수호연합(Alliance Defending Freedom)’을 이끈 마이클 패리스가 2000년에 패트릭헨리대학을 설립했다.

결정적으로 제리 폴웰을 비롯한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1979년에 ‘도덕적 다수’라는 뜻의 ‘모럴 매저리티’라는 기독 유권자 조직을 창설한다. 이 조직은 순식간에 미국 22개 주에 400여만 명의 회원을 갖추며 레이건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레이건 행정부가 보수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대한민국 보수 재건에 필요한 다섯 ‘P’

미국 보수주의 운동사(史)가 우리 대한민국 보수에 주는 교훈과 로드맵은 자명하다. 보수주의 사상의 활발한 교환과 정립(예: 《내셔널리뷰》), 보수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정치적 원칙의 확립(예: 〈샤론선언문〉), 청년운동가 양성 및 조직화(예: YAF), 자금력 확보(기업 및 개인),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연대와 분업, 끊임없는 정책 연구와 생산(예싱크탱크), 운동력 있는 시민사회 육성, 원칙 있는 보수주의 정치인 발굴 및 지원, 기독교 세력 등의 도덕적 기반 구축 등이 그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길이다. 단지 길이 너무 멀어 보여서 자꾸만 다른 어떤 ‘한 방’의 쉬운 길을 찾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되는 좌익 혁명가들과 달리, 벽돌 하나부터 쌓아야 하는 보수우파에게는 ‘왕도(王道)’가 있을 수 없다. 보수 운동에 있어 가장 우선되는 바탕은 무엇보다 현실인식이다. 미국 현대 보수주의 운동의 초창기부터 깊이 몸담았던 저명한 보수주의 역사학자 리 에드워즈는 미국 보수주의 재건의 배경에는 다섯 가지 ‘P’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사상가(Philosophers), 재정후원자(Philanthropists), 대중보급가(Popularizers), 정치인(Politicians), 그리고 문화예술인(Poets)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 진영을 살펴보면, 보수주의 사상가들과 대중보급가들이 몇몇 떠오른다. 재정후원자와 정치인도 간혹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화예술인은 물론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귀하다. 할 일이 많다. 바로 그 일에 착수하자.



글쓴이 조평세 박사는 누구?

1983년생. 런던대 킹스칼리지(KCL) 종교학 학사, 전쟁학 석사, 고려대 북한학 박사 졸업 / 現 1776연구소 대표, 《월드뷰》 부편집장, 전국청년연합 바로서다 이사 / 역서 《레이건 일레븐》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 《웨인 그루뎀의 성경과 정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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