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 당시 청와대 경호실 관계자들, 안전점검 목적으로
한인회관 다녀가 ••• 김영삼 대통령도 회관 방문 시도했지만 무산
뉴욕한인회관 현판식이 열린 지난 1984년 4월 30일 역대한인회장, 건립공로자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욕한인회는 지난 4월 회관매입과 관련한 은행 대출금을 40년만에 모두 상환했다.
“뉴욕한인들 대단해” ••• 전두환
대통령도 칭찬한 뉴욕한인회관 매입
1960년도는 한국에서 대혼란의 시기였다. 이해 4.19 혁명이 일어났으며, 두 달도 안 돼 내각제 개헌에 따라 6월 15일 장면 정권(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이 무렵 뉴욕에서는 뜻 있는 한인들이 모여 권익신장의 필요성과 구심점 역할을 할 단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6월 12일 뉴욕한인회를 창립했다. 따라서 뉴욕한인회는 올해로 창립 63주년을 맞는다. 단체는 창립했지만 당시 뉴욕한인회는 관계자들이 별달리 모임을 가질만한 장소가 없었다. 사무실도 변변히 없어 모임을 임원진 자택이나 식당 등에서 갖고는 했다.
제15대 이성종 회장은 맨해튼 소재 한국무역협회 건물 내에 뉴욕한인회 사무실을 꾸몄다.
17대 강익조 회장 당시인 1983년, 뉴욕한인회는 마침내 한인회관을 매입했다.
보다 못한 15대 이성종 회장(1978년 5월∼1980년 4월 재임)이 한국무역협회를 상대로 로비를 벌여 협회가 소유한 맨해튼 57가(460 Park Ave.) 건물의 회의실 하나를 임대할 수 있게 됐다. 남의 집 셋방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회관 마련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회관 매입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성종 회장 임기 중 2만 5천 달러가 모아졌다.
이후 16대 박지원 회장(1980년 5월~1982년 4월 재임) 당시에는 6만여 달러가 모금됐다. 마침내 17대 강익조 회장(1982년 5월∼1986년 4월 재임)시대를 맞으면서 뉴욕한인회는 범동포사회 모금 캠페인을 전개, 26만 달러를 모았다. 3대에 걸쳐 한인회가 모금한 액수는 총 34만6천7백65 달러였다. 모금이 일정수준에 달하자 뉴욕한인회는 한인회관 용도에 적합한 건물에 대한 물색작업에 나섰다.
한인회는 9개월간 60여 건물을 물색했다. 그 결과 맨해튼 24가(6번가와 7번가 사이)에 위치한 현재의 한인회관 건물(149 West 24 St.)이 결정됐다. 당시 건물주였던 ‘149 웨스트 어소시엣(149West Associated)’사와의 줄다리기 협상을 거쳐 1983년 5월 27일, 총 1백15만 달러에 건물 매입계약을 맺게 됐다. 뉴욕한인회는 계약과 함께 외환은행 뉴욕지점으로부터 10만 달러를 대출 받는데 성공했다.
그해 10월 27일, 총 45만 달러의 다운 페이먼트(Down Payment)를 모두 지불하고 클로징(Closing)을 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뉴욕한인회관을 마련하게된 것이었다. 이후 40년이 흐른 지난 4월 6일 뉴욕한인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한인회관에 대한 은행 대출금을 모두 갚아 한인회가 소유권을 100% 갖게 됐다. 매달 은행에 갚아야 했던 8천8백 달러가 넘는 대출금 상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서 앞으로 한인회의 재정 운영도 보다 원활해 질 것으로 기대 된다”고 밝혔다.
뉴욕한인회관, 청와대 경호실 경호등급
최하위 받아 ••• 노태우 대통령 방문 취소
뉴욕한인회가 세계의 중심 뉴욕 한복판에 지상 6층, 지하 1층짜리 자체건물을 매입한 사실은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1980년 8월 27일∼1988년 2월 24일 재임)도 이를 보고 받고 "뉴욕한인들 대단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19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당시 두 사람의 측근(육사 후배)이었던 A 씨(80대)는 본지에 “뉴욕 한인들이 맨해튼 한복판에 뉴욕한인회관을 매입한 사실은 청와대와 정부 인사들에게도 화제 거리였다”며 “노태우 위원장이 내게 ‘뉴욕사람들, 대단한 일 했어. 언제 때 되면 뉴욕한인회관 한번 가봐야 겠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제13대 대통령( ∼1993년 2월 24일 재임)이 취임했다. 그는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하자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유엔총회 참석차 이해 9월 23일 뉴욕을 찾았다. 변종덕 제21대 뉴욕한인회장(1990년 5월∼1992년 4월 재임) 때의 일이었다.
다음은 청와대 경호실 관계자였던 B 씨(서울 거주)의 증언이다. “당초 노태우 대통령은 뉴욕한인회관에서 동포간담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그래서 선발대로 뉴욕에 간 청와대 경호실(현 경호처) 직원들이 한인회관에 대한 안전점검을 실시했다.
하지만 뉴욕한인회관은 도저히 일국의 VIP가 방문 할 장소가 못 됐다. 무엇보다 비상시 탈출할 탈출구가 변변치 않았다. 엘리베이터(승강기)는 낡고 오래됐으며 소형이었다. 또한 계단은 좁고 어두웠으며 다니기가 매우 불편했다. 이런 곳으로 어떻게 대통령을 모실 수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뉴욕한인회관은 경호등급 최하점을 받고 대통령 방문 일정에서 제외됐다“
노 대통령의 한인회관 방문은 무산됐지만 대통령과 함께 뉴욕을 방문한 김영삼 민자당 대표(당시)는 9월 23일 한인회관을 찾아 한인회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지난 1991년 9월 23일 뉴욕한인회관을 방문한 김영삼 민자당 대표(당시)가 뉴욕한인회 오영준 부회장(작고)으로부터 기념품을 받고 있다.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는 변종덕 당시 뉴욕한인회장. <사진=KBS 뉴스 화면 촬영>
민자당 대표 시절 뉴욕한인회관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에는 방문 취소
노태우 대통령이 물러나고 김영삼 전 민자당 대표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1993년 2월 25일∼1998년 2월 24일)에 취임했다.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후 한국 대통령들은 거의 매년 뉴욕을 방문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 대통령은 민자당 대표시절 뉴욕한인회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한인회관을 찾기 원했다.
하지만 당대표와 대통령의 경호는 하늘과 땅 차이다. 1997년 6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했다. 이에 앞서 청와대는 방문 일정을 짜기 위해 뉴욕총영사관에 문의를 했다. 다음은 청와대 관계자와 당시 박노수 총영사(16대·1996년 3월∼1999년 3월 재임)가 나눴다고 알려진 대화 내용이다.
“이번 방미에 뉴욕한인회관 방문 일정도 넣으려는데 괜찮겠습니까? 동포간담회를 한인회관에서 하려고 합니다”
“안 됩니다. 뉴욕한인회관은 경호 취약지입니다”
“그렇습니까?”
“대통령께서 한인회관을 방문해서는 안 됩니다. 뉴욕한인회관은 VIP를 모시기에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박노수 뉴욕총영사의 말은 정확했다. 심지어 뉴욕한인회관의 한 대 밖에 없는 승객용 엘리베이터는 자주 고장 나 방문객들이 갇히기 일쑤였다. 당시 뉴욕한인회를 출입하던 기자도 두 번이나 갇히는 사고를 당했다. 또한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나 운행이 멈춘 상태였다.
다음은 이정화 제24대 뉴욕한인회장(1995년 5월∼1997년 4월 재임)의 증언이다. “박노수 뉴욕총영사가 전화를 해 와 자신이 대통령의 한인회관 방문을 적극 반대했다고 말했다. 사실 뉴욕한인회관은 대통령을 모실 수 있는 장소가 못된다. 당시 엘리베이터는 잦은 고장으로 인해 방문객들이 매우 불안해 할 때였다. 보다 못해 엘리베이터 교체작업을 실시했는데 한인회에 돈이 없어 내 개인돈 5만 달러 이상이 들어갔다”
김영삼 대통령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을 거쳐 윤석열 대통령까지 한국 대통령들의 뉴욕한인회 방문은 대통령 경호처의 논외 사항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경호처의 한 관계자는 “작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의 뉴욕 방문 때도 한인회관 방문은 논외 대상이었다”면서 “동포간담회를 한인회관이 아닌 맨해튼 ‘유니버시티클럽오브뉴욕’(1 West 54 St.)이란 연회장에서 연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뉴욕한인회관이 경호하기에 문제가 없는 곳으로 이전하거나 별도의 시설을 마련한다면 얼마든지 대통령이 방문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대통령의 한인회관 방문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제16대 박노수 뉴욕총영사는 김영삼 대통령의 뉴욕한인회관 방문 일정을 만류했다.
뉴욕한인회관의 고질적인 문제인 고장난 엘리베이터를 자비로 교체한 이정화 제24대 뉴욕한인회장.
플러싱 함지박 식당이
뉴욕한인회관 별관인가?
맨해튼 뉴욕한인회관은 주차하기도 힘들고 한인들의 접근성도 떨어진다는 지적을 오래 전부터 받아왔다. 따라서 한인회관을 이전하거나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퀸즈에 별관(別館)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뉴욕한인회관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인회 모임을 플러싱에서 갖기 일쑤이다. 특히 37대 챨스 윤 회장 당시에는 이사장인 김영환 씨가 업주로 있는 플러싱 소재 함지박 식당에서 각종 회의를 진행했다.
이를 두고 한인 언론사의 한 기자는 “한인회 측이 모임을 갖고 식사를 한 후 함지박 식당에 정상적으로 식대를 지불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며 “이를 보며 ‘함지박 식당 대표가 뉴욕한인회 이사장이기 때문에 매상 올려주려고 매번 이 곳에서 모임을 갖나’라는 의구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결국 함지박 식당이 특혜를 받고 뉴욕한인회의 플러싱 별관 역할을 한 셈”이라면서 “다시는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퀸즈에 한인회관 별관 또는 사무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여타 식당 업주들도 불만을 표했다. 플러싱 C 식당 업주는 “뉴욕한인회가 공익단체라면 함지박 식당뿐만 아니라 다른 식당에서도 골고루 모임을 가졌어야 했다”며 “식당 업주가 한인회 이사장이라고 해당 식당에서만 모임을 갖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D 식당 업주는 “언론에 등장한 함지박 식당 모임만 10번이 넘는다”며 “37대 뉴욕한인회가 이러니 욕을 먹고, 회장 선거도 엉망으로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업주는 “김영환 씨가 물러난 후 다른 식당에서 모임을 갖는 것을 언론보도를 통해 봤다”며 “이럴 바에는 뉴욕한인회 사무실이든 별관을 플러싱에 만들 것을 촉구 한다”고 덧붙였다.
37대 뉴욕한인회는 이사장이었던 김영환 씨(위 사진)가 업주로 있는 플러싱 소재 함지박 식당에서 각종 모임을 가져 특혜논란을 불러왔다.
한편 김기철 28대 뉴욕한인회장(2003년 5월~2005년 4월 재임)은 본지에 이렇게 말했다. “벌금만 10만 달러가 넘은 화물용 엘리베이터 고장문제도 내 임기 때 해결했다. 뉴욕한인회관이 낡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한인회관 대출금도 다 갚았으니 한인회관 건물의 흑자운영이 기대된다. 지금부터라도 시드머니(Seed Money)를 조성해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퀸즈에 뉴욕한인회관 별관을 마련해야 한다.
맨해튼 한인회관을 이전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널찍한 장소에 주차하기도 편리한 한인회관 별관이 들어서면 한국 대통령들도 방문해 동포간담회도 갖고 얼마나 좋겠는가. 무엇보다 한인회관의 주인인 동포들이 자주 방문해 사랑방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심도있게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할 때이다“
뉴욕=임종규 선임기자
서울=최영수 기자
제28대 김기철 뉴욕한인회장은 "이제는 뉴욕한인회관 별관 설립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