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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규 기자의 세상읽기〉 1942년생 동갑내기 세 남자의 인연과 악연
  • 임종규 편집인 겸 선임기자
  • 등록 2022-12-19 13:45:15
  • 수정 2023-01-01 06: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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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신나라 충신' 박지원 前 뉴욕한인회장님! 이제 그만 쉬시죠




 

속적으로 말해서 미주한인 이민 1세들 중 박지원 전 뉴욕한인회장(이하 박지원)보다 출세한 사람은 없습니다물론 출세란 개념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기자 같은 필부(匹夫)가 볼 때 그렇다는 겁니다박지원의 관운(官運)과 처세술(處世術)세계 정상급입니다그는 국회의원장관대통령 비서실장국정원장 등 안 해 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문재인 정권 때는 국무총리 자리도 노렸습니다미주동포 출신 가운데 김혁규 전 경남지사(전 뉴욕한인경제인협회장), 유종근 전 전북지사(전 뉴저지 럿거스대 교수),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원 등이 이른바 출세 동포들의 선두주자이지만 박지원을 따라 갈 수는 없습니다박지원이 1942년생이니까 올해 나이 81세(2023년 기준)입니다.


그는 38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제16대 뉴욕한인회장(19804~19824)을 지낸 인물입니다이후 박지원은 뉴욕에서 미주지역한인회총연합회장민주평통뉴욕협의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이 무렵 박지원은 미국에 망명 온 야당인사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김대중)을 만났습니다


김대중의 망명기간이 19821223일부터 19852 8일까지니까 박지원은 한인회장을 그만둔 후 그를 만난 것이죠한인회장을 할 때 박지원은 친(전두환계 인사였습니다. 1981130일 전두환 대통령(이하 전두환)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박지원은 한인회장 자격으로 각 단체를 아우른 환영위원회를 구성해 위원장 자리를 맡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가발사업이 어려웠던 박지원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1942년생·2021년 사망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사무총장 덕분에 망해가던 사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당시 전경환은 외환은행 뉴욕지점에서 1백 20만 달러를 대출 받게 해주는 등 수 차례에 걸쳐 거액의 대출을 박지원에게 지원해 줬습니다어찌 보면 박지원에게 있어 전경환은 은인이나 마찬가지 존재였습니다.


전경환을 통해 신군부 주변을 기웃거리던 박지원을 김대중에게 소개시켜 사상적 전향을 시킨 인물이 바로 동갑내기 김경재 전 의원(이하 김경재)입니다서울대 출신인 그는 유신정권을 피해 도미한 후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당시에는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엘리트 언론인이었습니다


박지원은 음지의 실세’ 전경환의 측근에서 동향(同鄕)의 동갑내기 진보 지식인 김경재에 의해 김대중이란 말로 갈아타게 된 것입니다전경환 입장에서 보면 박지원은 배신자이자 변절자인 셈이죠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 수도 있는 얘기이지만 지금부터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음 얘기는 예전에 김경재가 기자에게 직접 해 준 말입니다.

내가 박지원에게 말했지전라도 사람인 당신이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득실거리는 신군부 세력 내에서 설 자리는 없다그러니까 김대중 선생님 곁으로 와라우리 전라도 사람들끼리 새로운 세상을 한번 만들어 보자.


박지원도 전두환 측근에게 나와 비슷한 얘기를 듣고는 고민을 했던 것 같아내가 김대중 선생님에게 박지원을 소개 시켜주던 날그 사람이 3천 달러를 들고 왔어선생님 생활비라며...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지당신 가발장사해서 돈도 많이 벌면서 일국의 야당 지도자에게 겨우 3천 달러가 뭐냐그래서 내가 2천 달러를 보태서 5천 달러를 선생님께 드렸지


김대중과 김경재는 달변가입니다두 사람의 사상과 언어는 당시 별다른 정치철학이 없던 장사꾼’ 박지원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이로서 1942년생 전경환박지원김경재 세사람은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전경환은 이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역임하며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하는 등 막강한 권력의 실세로서 맹활약을 하다 교도소 담장을 넘나드는 영욕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또 박지원 역시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직전 불법 대북송금혐의로 이 사건을 맡은 특검팀에 의해 20036월 구속됐습니다이후 불법송금 관여(외국환거래법 위반 및 직권남용)와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알선수재죄)에 대한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동갑내기 3인방 중 김경재는 어땠을까요.

그는 대북문제와 관련김대중에게 직언(直言)을 하다 쫓겨나 권력자의 최측근 자리를 박지원에게 물려 줬습니다이후 그는 자유우파로 전향하여 박근혜 정권 때 한국자유총연맹 총재까지 지냈습니다그는 문재인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강력한 저항운동에 앞장섰습니다좌파 정치인이었던 김경재의 변신은 무서웠습니다.


김경재는 지난 2020815일 광복절 집회를 불법’ 주도한 혐의로 감옥에 갇혔습니다그는 구속 4개월 후인 그해 12간신히 보석으로 석방돼 지금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2022년 12월 21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찰로 부터 징역 1년에 벌금 6백만원형을 구형 받았습니다.


1942년생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온갖 권세를 누리다 20211021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전땅크란 별명을 가진 그의 형도 그해 1123일 영면(永眠)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꽃길을 걸었지만 좌파 권력자에게 바른 말을 하다 권력 주변에서 멀어졌습니다그는 우파로 전향 한 후 지금은 군소정당 활동을 하며 고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남은 한 사람은 나이 여든에 30대 여성과 염문(艶聞)을 뿌리기도하고재임 중 취득한 정보기관 내막을 외부에 흘리기도 하는 추태를 보였습니다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정보기관장 자리에서 쫓겨 난 이 사람은 권력이 그리워서인지 지금도 정치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결국 지난 12월 19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 했습니다.


 

1942년 동갑내기인 박지원, 김경재, 故 전경환. 전경환의 도움을 받던 박지원은 김경재의 소개로 김대중을 만나면서 전경환을 배신하고 말았다. 




지원의 노욕(老慾)과 노추(老醜)는 그를 잘 아는 뉴욕의 올드 타이머’ 동포들에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옵니다김경재가 과거를 후회하며 살고 있는 반면 박지원은 여든 노구(老軀)를 이끌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오늘도 열심히 페이스북(Facebook)’을 합니다정치권 여기저기 훈수를 두면 관종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권력의 맛이 좋을까요그만큼 권력을 맛봤으면 그만 내려놓을 만도 한데 그는 그러질 못합니다나이 여든 하나에 무엇을 더 바랄까요한 때 그를 응원했던 뉴욕의 한 진보 인사는 지금 박지원은 노추의 끝판왕을 보여주고 있다제발 더 이상 지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사라져주길 기대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는 오래 전부터 박지원을 지켜보며 그의 권모술수(權謀術數)에 혀를 내두르곤 했습니다기자들에게 서슴없이 동지라고 부르며 기자들 부인 선물까지 챙기는 모습,   수행원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뉴욕을 방문한 후 혼자 노란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뉴욕의 원로 여성단체장이 세상을 뜨기 전 기자에게 한 증언국정원장 재임시절 뉴욕을 방문한 후 몰래 좌파 성향의 전직 뉴욕한인회장과 미국 정치인을 만나는 행동밤새도록 술을 마시고도 대통령이 일어나기 전 새벽에 집을 찾아가 조간신문을 들고 대통령 방문 앞에 서 있는 모습 등 그와 관련해 일반인들이 모르는 얘기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합니다.


박지원이 권력에 아부하며 간신 나라 충신’ 노릇을 한 것에 비해 김경재는 양심적이고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친 김대중계 언론인이 기자에게 해 준 말입니다.

김대중 정권 마지막 해인 2002년 어느 날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김경재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과 함께 강남의 모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김경재와 나는 제 시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박지원은 한 시간이나 늦게 약속장소에 나타났다나와 함께 세상얘기를 하던 김경재는 박지원이 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치며 그의 뺨을 후려쳤다. ‘야 이 새끼야너 때문에 나라꼴이 이게 뭐냐?’

뺨을 맞은 박지원도 김경재에게 지지 않고 대들어 옥신각신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술집 여종업원들까지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간신히 상황이 진정됐지만 김경재는 박지원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했다간신 같은 새끼’ 그 때 김경재가 박지원을 보며 나지막이 뱉은 말 이었다” 


기자는 훗날 박지원의 묘비명(墓碑銘)이 어떻게 쓰여 질 지 궁금해집니다.

그 전에 기자는 박지원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습니다박지원 전 뉴욕한인회장님이제 그만 쉬세요. ‘간신나라 충신’ 노릇 할 만큼 충분히 했습니다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반드시 감옥갑니다” 

하지만 기자의 조언과는 달리 그에게 또 다시 감옥에 갈 지도 모를 일이 생겼습니다. 지난 12월 29일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첩보 삭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기 때문입니다. 팔순 넘은 나이에 젊은 판사, 검사들에게 구구절절 변명하고 거짓말 할 그가 안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는 언제쯤이면 지난 삶을 후회하고 반성을 할까요. 어쩌면 박지원의 팔자에는 반성이나 후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훗날 역사책에 이렇게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영원한 간신나라 충신' 박지원이란 사람이 살았다"


편집인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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