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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북한이 인정한 美 최고위 친북동포 이준무는 누구?
  • 임종규 선임기자
  • 등록 2024-09-12 13:57:38
  • 수정 2024-09-12 14:2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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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교향악단 지휘자 이준무, 유명음악 사이에 북한 정권 찬양곡 삽입해 관객 우롱하기 일쑤





북한이 인정한 미국 최고위 친북한 동포 이준무 우륵 교향악단장 겸 상임지휘자(뉴저지 거주). 그는 미주 최대의 친북한 단체인 재미동포전국연합의 실질적 리더이기도 하다.


윤이상뉴욕 통일음악회 지휘자로 친북음악인 이준무 대신 심경흠 선택


 

196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북한이 인정하는 최고의 해외동포 음악인은 윤이상(1917917~1995113)이었다그는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한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기타리스트 첼리스트 겸 현대 음악 작곡가였다그는 음악에 대해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었다.


1956년부터 유럽에 거주한 윤이상은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유럽 음악계는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윤이상은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기까지 했다하지만 그는 친북을 넘어 종북주의자였다심지어는 간첩이란 말까지 있었다



                             김일성(가운데)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한 윤이상(왼쪽), 이수자 부부.  

                             윤이상의 생전 꿈은 세계 중심지 뉴욕에서 자신의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윤이상은 1963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당시 김형욱이 부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내사에 들어갔다19676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이른바 동백림 사건’ 이었다


19671213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유럽 유명 음악인들의 탄원 덕분에 재심·삼심에서 감형 받았고, 19692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박정희 정권에 환멸을 느낀 그는 1971년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다한국정부는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입국을 불허했다한국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이렇게 된 데에는 윤이상의 잘 못도 크다그가 서독으로 귀화한 후 본격적으로 북한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1985년에는 오길남(1942년생·경제학자)씨 가족을 북한으로 유인하여 그들이 북한에 억류되게 하는 등 윤이상은 북한을 위한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또한 한국정부가 이적단체로 규정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초기 해외지부 의장도 역임했었다그런 활동 때문에 현재 북한에는 윤이상관현악단이 존재하고 있으며 윤이상음악연구소도 설립돼 있다또한 매년 북한정권은 윤이상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이런 윤이상에게도 꿈이 하나 있었다.


세계의 중심지 뉴욕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음악회를 개최하고 싶어 했다실제로 그는 1995113일과 15일 이틀간 뉴욕에서 통일음악회를 개최하고자 동분서주했다뉴욕과 독일을 몇 차례 왕래하기 까지 했다뉴욕의 친북동포들이 그의 협조자였다맨해튼 링컨센터에서 그의 공연을 하기위해 모든 계획이 잘 짜여졌다.


친북동포들은 준비위원회 사무실까지 마련하고 음악회 기금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링컨센터에 계약금 8천 달러도 지불했다북한에서는 보조지휘자를 포함 6명의 윤이상음악연구소 소속 연주자가 음악회에 동참하기로 했다당시는 1991917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이후여서 한반도에 해빙무드가 조성 될 시기였다.


윤이상 음악회가 뉴욕에서 착착 준비되고 있었지만 윤이상 배후에서는 음모의 싹이 피어나고 있었다당시 뉴욕한인 음악계에는 활동을 열심히 하는 정상급 음악인이 2명 있었다한 사람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이준무(75)였고 또 다른 사람은 연세대 음대를 나온 심경흠(1939년생·작고)이었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이준무는 전주남중학교와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남원에서 초등학교 교원으로  4년간 근무하다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진학바이올린을 전공한 후 국립교향악단을 거쳤다19721월 미국으로 이민 와 1981년 서울대학교동창회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이후 오케스트라는  '서울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브 뉴욕(서울교향악단)'으로 개칭했다가 2000년 '우륵 심포니(Ureuk Symphony) 오케스트라(우륵교향악단)'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심경흠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도미몬클레어 뉴저지 주립대학 대학원과 예슈아대학 대학원을 나왔다이후 한국으로 돌아가 계명대학교 음대 교수를 하다 뉴욕에 다시 와 뉴욕한인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등으로 왕성한 연주활동을 전개했다그는 한인 1세대 음악인 중에는 뉴욕동포사회에 제일 잘 알려졌던 인물이었다.


                                              살아 생전의 심경흠 씨. 그는 뉴욕 윤이상 음악회 취소와 관련한 피해자였다.


주변에서 음악회 지휘자로 이준무심경흠을 추천했지만 윤이상은 별다른 고민 없이 심경흠을 선택했다그러면서 이준무의 음악실력에 대해선 심경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다이 같은 결정과 평가는 이준무에게도 전해졌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인 음악가 씨는 이준무는 친북 음악인이었고심경흠은 그렇지 않았다면서 당시 윤이상은 이념을 떠나 순수 음악실력으로 심경흠을 선택했다고 말했다씨는 윤이상의 이러한 결정은 이준무를 비롯한 친북한 동포들의 반발을 샀던 것으로 알고 있다결국 이점이 음악회 개최가 취소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고 전했다.

 

 

윤이상 뉴욕음악회 거짓투서로 인해 취소 ... 몸 상태 안 좋았던 화병(火病)으로 사망

 

 

심경흠은 자신이 국제적 이슈가 될 통일음악회에 지휘자로 선정되자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윤이상에게 이런 말을 한다윤 선생님의 심오한 곡들을 저 혼자 모두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보조 지휘자가 필요합니다” 이 같은 심경흠의 제안에 윤이상은 평양에다 연락해 공연 중간에 심경흠 대신 지휘 할 보조 지휘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각 파트별로 협연 할 북한 연주자 3-4명도 함께 뉴욕을 방문 해 줄 것을 당부했다이러고 있는 사이 북한 당국에는 심경흠과 이번 음악회를 준비 책임자인 친북한 동포 K는 남한 국가안전기획부의 자금을 받는 앞잡이들이란 투서가 수차례 전달됐다.


친북동포 씨는 당시 투서 작성에는 이준무도 간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투서들은 캐나다에 거주하던 북미주 최고위급 친북인사였던 전충림에게 전달됐고 그에 의해서 평양에 보내졌다고 밝혔다.


전충림은 북한이 유엔에 가입하기 이전까지는 비공식 북한대사라고 불리던 거물급 친북한 인사였다그가 북미주지역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미국과 캐나다에 유신독재에 반대해 조국을 등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전충림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일보 업무국장출신으로 73년부터 토론토에서 반정부 교포신문을 운영했다.

그는 1979년 함북 여흥에 친누나와 북의 친척들을 방문하고 온 뒤부터 친북한 사상으로 변했다그후 전충림은 자신이 운영하던 반정부성향신문을 아예 친북 성향지로 바꾼 후 본격적인 대북 창구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북미주 한인사회 최고위 친북한 인사였던 故 전충림 씨. 그의 죽음 역시 윤이상 음악회 취소와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도 그의 이 같은 점을 인정미국과 캐나다에서 비공식 북한대사 활동을 하게 허용했다뉴욕에서 보낸 투서들은 김정일의 손에까지 들어갔다부하들의 투서에 근거한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격노하며 음악회 취소 지시를 내렸다여기에는 윤이상에 대한 김정일의 오해도 한몫했다북한 김일성이 199474일을 사망했다당초 북한 당국은 78일부터 717일까지 10일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여기에다 사흘을 더해 13일장을 치르라고 지시했다결국 김일성의 장례기간은 78일부터 20일까지였다하지만 윤이상은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장례기간 동안 평양을 방문 할 수 없었다장례기간이 끝 난지 몇 달 후에야 윤이상은 평양을 찾을 수가 있었다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평양에 도착했을 때 윤이상은 혈압은 높이 오르고 온 몸은 부어 있었다.


이런 윤이상에게 김정일의 힐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당신은 수령님 살아 생전에 그렇게 도움을 많이 받아 놓고는 수령님 장례기간 동안에찾아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괘씸하기 짝이 없다그리고 미국의 우리 쪽 동포들이 당신을 안기부 앞잡이라고 하는 투서들을 보내 왔다뉴욕 음악회 때려치워라” 김정일의 이 말에 윤이상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안기부 앞잡이란 말에다 평생의 꿈이었던 뉴욕에서의 공연이 물거품 됐다는 사실을 윤이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심한 충격을 받은 윤이상은 북한을 떠나 도쿄에 도착한 후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이는 북한과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윤이상과 북한과의 관계는 이렇게 끝났다


가뜩이나 몸 상태가 안 좋은 윤이상에게 화병(火病)까지 더해졌다199412월 윤이상은 도쿄에서 폐렴으로 입원했다. 6주일을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몸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안 보였다안기부 앞잡이라는 낙인과 뉴욕음악회 취소에 대한 충격은 그만큼 컸다


19952월에서야 베를린에 돌아간 윤이상은 이미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결국 그는 북한에서 김정일에게 안기부 앞잡이뉴욕음악회 취소란 말을 들은 지 1년만인 199511월 베를린 발트 병원에서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표면적인 사망 원인은 폐렴이었다.

 


윤이상 뉴욕음악회 취소는 심경흠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맨해튼 링컨센터에서 열리기로 했던 윤이상 음악회의 취소는 심경흠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심경흠도 이 음악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자신이 북한에 의해 안기부 앞잡이로 낙인 찍혔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자신은 이념을 떠난 순수하게 윤이상 음악을 접했을 뿐인데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심경흠은 이때부터 폭음의 정도가 심해졌다결국 그는 1997년 무렵부터 당뇨와 중풍으로 고생하다 근육무력증과 실어증까지 얻게 됐다또한 심경흠은 시력까지 잃게 되면서 음악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전립선 암 진단까지 받았다그의 말년은 너무 불행하고 쓸쓸했다


201161일 심경흠은 뉴저지 한국요양원에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그를 잘 아는 동포 박모 씨는 윤이상 음악회 취소 이후부터 심경흠은 건강을 돌보지 않고 막 살기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만큼 그는 음악회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고 말했다


윤이상 음악회 취소는 후폭풍이 컸다윤이상이 북한과의 단절을 선언하자 북한 당국자들은 음악회 취소를 후회하기 시작했다.북한 당국자들은 평양을 방문한 친북한 동포들에게 당시에는 우리가 너무 경솔했다투서만 너무 믿고 성급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캐나다의 전충림에게 물었다당신이 그런 엉터리 투서를 내용도 거르지 않은 채 평양에 올린 잘 못이 크다그로인해 뉴욕에서 열리기로 했던 통일음악회도 열리지 못했고 윤이상 선생도 우리와 관계를 끊었다.당신은 장군님께 허위정보를 올렸다모든 것이 당신 책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은 전충림을 멀리했다북한으로부터 버림받은 72세의 전충림은 시름시름 앓다가 1995417일 사망했다윤이상이 죽기 7개월 전이었다북한에 충성을 다한 전충림의 죽음은 허망했다.


 


2017년 4월 13일 평양에서 열린 제 30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서 이준무 등 단원들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이준무는 이 행사에 매년 참가해 북한 악단의 지휘를 맡고 있다.


                   평양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준무의 모습. 




북한 정권이준무의 30년 넘는 꾸준한 친북 및 음악활동 인정



윤이상과 전충림이 세상을 뜨고 나자 북한은 해외동포 음악계의 새로운 책임자가 필요했다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봤지만 이준무 밖에 없었다북한은 30년 넘게 꾸준히 친북활동과 음악활동을 하는 이준무를 윤이상 대체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윤이상 보다는 거물급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북한이 인정하는 최고위 해외 음악인은 이준무 뿐이다뉴저지 티넥에 거주하는 이준무(미국명 크리스토퍼 리)는 현재 우륵 심포니 오케스트라 운영자 겸 상임지휘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우륵 오케스트라에는 수 십 명의 단원이 속해있다


강모이모홍모김모 등의 한인단원들도 눈에 띤다물론 이들은 돈을 받고 공연하는 연주자들이다친북성향인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우륵 오케스트라는 공연 때마다 모차르트차이코프스키 등 유명 음악가의 곡()과 곡 사이에 북한음악을 삽입해 들려준다.


거의 모든 음악회에서 우륵 오케스트라는 김정은을 찬양하는 발걸음을 비롯 우리의 맹세’,  승리의 행진’,  ‘나의 조국’,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 등 북한 음악들을 연주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우륵은 지난 10년 동안 1년에 서너 차례씩 뉴욕에서 공연을 갖고 있다우륵의 활동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음악인들은 적지 않다.


한인 음악인들은 공연장 대관료와 수십명 단원들에 대한 공연비 지급 등이 큰 금액일 텐데그것이 어떻게 충당되는지 무척 궁금하다“3050 달러짜리 공연 티켓만 팔아서는 가능 할 것 같지는 않다고 입을 모았다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이 그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아마도 뉴욕의 친북한 한인들이 그를 도와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김정은을 찬양하는 노래 '발걸음'을 부르고 있는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이준무의 우륵 오케스트라는 이들이 부르는 노래 등을 뉴욕에서 매년 연주하고 있다.




그동안 우륵은 특히 216일 김정일 생일(광명성절)415일 김일성 생일(태양절무렵에는 반드시 기념음악회를 개최해 왔다.이준무의 이런 꾸준함은 북한이 그를 최고의 해외음악인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이준무는 태양절을 기념하기 위해 평양에서 개최되고 있는 음악제인 ‹사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1996년부터 매년 초청되어 조선국립교향악단평양교향악단윤이상 관현악단 등을 지휘 하고 있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 온 친북동포 씨는 북한당국자들이 이준무를 지칭하며 우리 공화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해외동포 음악인이라고 치켜세웠다북한에서 이준무의 위상이 대단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또 다른 친북동포 씨는 그가 북한을 1년에 한 두 차례 방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평양에 도착하면 이준무는 순안공항에서 세관검사도 받지 않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준무가 북한에서 인정하는 거물급 음악인이란 사실은 2016년과 2017년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북한 리용호 외무상의 행보로 더욱 확실해 졌다리용호는 흔히 있을 법만 친북한 간담회나 리셉션도 갖지 않았지만 이준무의 음악회만은 참석했다특히 2017년은 그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강한 비난을 쏟아낸 직후였다. 


당시 우륵의 공연이 열린 맨해튼 머킨(Merkin) 콘서트홀은 총 449이중 1백여석이가 2층에 위치해 있다우륵 측은 리용호 일행을 위해 일반인 관객들의 2층 출입을 막았다이 공연을 취재한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는 이준무에게 북한을 지원하는 음악공연에 관한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정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이준무는 나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상관없다면서 다만 통일한국을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당시 이준무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에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글이 올라와 있다리용호는 2018년 9월에도 뉴욕을 방문하고 이준무가 실질적 리더로 있는 친북단체 재미동포전국연합회(KANC) 관계자들과 친목모임을 가졌다. 

 

이준무는 이 단체에서 문화예술분과위원장 겸 동부지역 연합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리용호는 9월 30일 맨해튼의 고급 중국식당에서 30여명의 친북동포가 참석한 모임에서 북한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당부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표면적으로는 '대북 교류를 위한 비영리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1997년 설립 당시부터 북한 당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것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친북단체이다. 이 단체는 현재 회장 선출문제로 내분을 겪고 있어 이준무가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리용호는 미국 측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차량에서 내려 식당에 들어서면서 활짝 웃는 얼굴로 이준무 등 단체 간부들과 인사했다. 식당 내부 포스터에는 '온 겨레가 민족 자주의 기치 아래 부강번영 통일강국 일떠 세우자!'는 북한식 구호가 적혀 있었다.

리용호는 이날 모임에서 참석자들을 향해 "북한은 비핵화를 향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은 이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며 대북 제재 해제를 호소했다.




                                                  2017년 9월 뉴욕을 방문한 북한 외무상 리용호.




우륵교향악단은 2018년에만 남북미 3국 간 대화 분위기로 인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곡을제외 했지만 매년 변함없이 친북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우륵교향악단은 2019년 10월 5일 오후 8시 맨해튼 머킨 콘서트홀에서 10.4 남북공동선언 12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122회 공연을 열었다.  


우륵 측은 이번 공연에서 모차르트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고 홍보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오프닝 곡부터 북한 체제 찬양가인 '인민의 환희(People's Joy)'를 교향곡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그러나 참석한 미국인 관객들은 무슨 곡인지도 모른채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우륵악단의 연주는 늘 북한을 찬양하는 곡이 유명 곡들 사이에 끼어 있는데다 가사도 없기때문에 관객들은 음악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른 채 연주만 듣고 박수를 치고 있다.


이날 2부 공연 시작곡 역시 대표적 김정일 찬양가 중 한 곡인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I will always be your son)'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이외에도 이 악단은 모차르트 교향곡 등 기존 클래식 음악과 더불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인민의 환희’, ‘인민이 사랑하는 우리 령도자’ 등을 연주했다.  




'꼼수 음악회' 비난 받는 이준무, "자유란 북한주민들 각자가 판단하는 것" 궤변 



이로 인해 "이준무의 음악회는 항상 관객들을 우롱하고 있다"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예전에도 우륵 측은 차이콥스키 등 고전음악만 연주한다고 홍보해 표를 팔았지만, 막상 연주회에선 교향곡 모음이란 이름으로 북한 선전음악 3곡을 연주했다.


이준무는 늘상 이런 식이다.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 친북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친북활동을 중단한 H 씨는 "이준무는 더 이상의 꼼수를 그만 부리고 차라리 노골적으로 북한음악회를 개최하라"면서 "차라리 그것이 더 북한에 충성하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이어 H 씨는 "나이가 70세가 넘는 이준무가 무엇이 두려워 매번 꼼수를 부리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그는 친북을 넘어 종북주의자로 알려져 있어 한미정보기관이 그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뉴욕에 본부를 둔 민간단체 인권재단(HRF) 역시 우륵교향악단의 음악회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몇 년 전, 인권재단은 이 음악회에 대해  “터무니없는 홍보 사기”라며 "음악회가 김정은 정권과 체제를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르 핼버슨 인권재단 회장은 성명에서 "북한은 세계 최악의 압제국이라며, 미국의 심장부에서 독재자 찬양곡을 연주하는 것은 옛 독일의 나치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알렉스 글래드스타인 전략기획실장은 "북한 당국은 그들의 영도자를 찬양하는 음악회가 세계의 중심 뉴욕에서 열렸다고 북한 주민들에게 선전하며 이를 위대한 승리로 포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글래드스타인 실장은 "친북 성향의 이 악단이 지금까지 모차르트와 멘델스존 같은 음악회를 여는 것처럼 위장한 뒤 실제로는 김정은과 그의 폭정을 찬양하는 곡을 유명곡들 사이에 연주해 왔다”고 지적했다. 또 글래드스타인 실장은 이런 음악회를 주최하는 사람들을 '악의 공범'에 비유하며 음악회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준무의 이 같은 활동을 북한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다음은 북한매체 <메아리>의 보도 내용이다.



주체111(2022)년 2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위인칭송 음악회 성황리에 진행 







지난 4일 미국의 뉴욕에서 우륵교향악단 125차 정기공연이 진행되였다.

유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임대표부 성원들과 뉴욕에서 살고 있는 재미동포들이 공연을 관람하였다.

우륵교향악단 단장인 재미동포 리준무가 지휘한 《2월의 봄》음악회에서는 관현악 《2월은 봄입니다》, 《내 고향의 정든 집》을 비롯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음악들과 외국음악들이 연주되였다.

공연을 본 한 재미동포는 매번 공연을 관람하는데 오늘 연주회는 특별했다. 미국의 심장부라고 할수 있는 뉴욕의 맨하탄에서 정기적으로 이렇게 연주회를 하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라고 말하였다.




자신에 대한 자유진영의 비난 여론에 대해 이준무는 북한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70년이나 미국의 파워에서 짓눌려 살았는데 이제 우리 민족끼리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우리 소리를  조금 내는 것 같고 뭐 그렇게 신경을 쓰나?  외세가 없는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끼리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뉴욕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멜팅팟(melting pot)이라고 한다. (우리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어울려서 사는 것이 좀 어떤가?"


또한 그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가 있는가 없는가는  주민들 각자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놨다.

 



                    이준무를 비롯한 우륵교향악단 단원들이 지난 10월 5일 연주회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김성 유엔주재 북한대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우륵교향악단 공연 관람 후 친북 인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준무는 어쩌다 이처럼 열렬한 종북주의자가 됐을까. 이준무를 잘 아는 동포 씨는 이런 말을 했다이민 초창기의 이준무는 별다른 친북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아마도 그의 이념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전 롱아일랜드한인교회(20103월 폐쇄)의 담임이었던 안중식 목사인 것 같다이준무가 이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있으면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안 목사와 의기투합 한 것으로 보인다.




                                                       이준무의 최근 모습.



1971년 창립한 롱아일랜드한인교회(뉴욕주 포트 워싱턴 소재)1980년대만 해도 소위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의 중심지였다지난 2006년 교회를 사임한 안중식 목사는 지난 20097월 세상을 떠난 박성모 목사와 함께 해외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 교회는 한때 한완상 전 총리와 서경석 목사김민웅 목사(현 촛불행동 상임대표) 등이 거쳐 가기도 했다. 자유우파 정부에 대한 반정부가 발전하면 친북한이 되기도 한다아마 이준무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종북활동을 할 것으로 보인다그만큼 이념은 무서운 것이다


임종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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