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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대통령 영부인을 협박한 뉴욕 한인여성(2탄)
  • 임종규 선임기자
  • 등록 2024-09-12 12: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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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금은방 업주김윤옥 여사에게 “20억원 내놔라” 요구 ••• 청와대,

경찰청 특수수사대에 수사 지시했지만 사건 터질까봐 전전긍긍





<1탄에 이어 계속>




                     이순례 씨는 김윤옥 여사를 만나겠다며 무작정 청와대로 찾아갔다.




“큰 것으로 두 장 달라고 전해주세요”



서울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던 기자에게 이순례 씨가 뉴욕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마침내 요구액수를 밝히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액수를 밝히겠다면서 정확한 액수를 말하지 않고 자기 하소연만 계속해 댔다. 


이 씨는 이런 식으로 기자에서 한 시간 단위로 여섯 차례나 전화를 해 왔다. 뉴욕이 낮이면 서울은 밤인데, 그날 기자는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그녀의 전화에 시달렸다. 여섯번째 전화에 기자가 화를 내며 이번 일에 나는 손을 떼겠다고 하자 그녀는 비로소 액수를 말했다.


“큰 것으로 두 장 달라고 전해 주세요”

“2억원이요?”

“아니 내가 거지도 아니고 그 정도 돈 때문에 내가 이 난리를 친 줄 아세요?”

“그럼?”

“20억원이요. 김 여사가 돈 많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예요”

“당신 미치지 않았소? 내가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에게 얘기는 전달하겠지만 당신 그러다가 감옥에 갈 것 같소”

“걱정마세요. 나도 다 생각이 있어요. 지금 이 시국에 이 사건 터지면 아마 볼만 할 것입니다. 제가 며칠 후에 한국 나가서 직접 일 처리 할게요”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 대통령 측근들은 김 여사 가방 사건을 대통령이 알아서는 안된다며 철저한 보안유지를 기자에게 당부했다. 사진은 이 대통령과 김 여사가 2008년 4월 15일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 환영객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는 모습. 



이순례 씨가 20억원을 요구한다는 말에 대통령 측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해결 할 수 없는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은 중간에서 배달사고를 저지른 김용걸 신부가 이 씨를 만나 설득과 회유를 하도록 당부했다. 이 무렵 이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만 모르고 있었지 김윤옥 여사, 청와대 민정수석실, 한나라당의 주요 이명박계 의원들까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됐다.


며칠 후 이 씨가 서울에 도착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 때문인지 아니면 한나라당 의원들의 강력한 부탁 때문인지 모르지만 김 신부가 이 씨를 직접 응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 신부는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이 씨를 만나 마지막 담판을 지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 씨는 김 신부와 만나면서 친구를 시켜 몰래 이 장면을 사진촬영하게 했다. 참으로 간 큰 여자였다. 이 씨는 이 사진을 자랑스럽게 기자에게 이메일로 보내 온 후 청와대로 김윤옥 여사를 직접 찾아가 담판 짓겠다며 전화를 해왔다.


기자는 “이 여자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어떻게 자기가 김 여사를 직접 만날 수 있나. 김 여사가 만나주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후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진짜 이 씨가 청와대로 직접 김 여사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청와대로 김 여사를 찾아간 이 씨를 면회실(당시 북악안내실 / 현 연풍문) 직원들은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 김 여사는 물론이고 사전 약속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청와대 직원 그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씨는 계속해서 김 여사를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김 여사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는 협박성 발언을 해댔다. 


이에 면회실 직원들은 혹시나 해서 영부인을 보좌하는 제 2부속실에 “이순례 씨란 사람이 가방 때문에 영부인을 만나러 뉴욕에서 왔다”고 알렸다. 이에 놀란 부속실장은 영부인이 머무는 청와대 별관에서 면회실까지 차를 보냈다. “당장 차에 태워서 들여보내세요”  


면회실의 한 관계자는 나중에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마 청와대가 세워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청와대는 무작정 찾아와 누군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다. 더군다나 직원이 직접 나오지 않고 부속실장 차량을 면회실로 직접 보내 면회객을 모시고 들어가는 행위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김 여사가 가방사건으로 인해 협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청와대 부속실장에게

피해보상과 영부인의 자필 

  해명 편지 원한다요구



청와대 제 2부속실장 방에 안내 된 이 씨는 자신의 요구사항을 실장에게 털어놨다.

“영부인에게 전해달라. 정신적 피해보상금과 김 여사 자필로 된 해명의 편지를 달라. 정확한 액수는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겠다. 이미 한나라당 측에 얘기를 해 놨으니 정두언 의원 등에게 전해 들어라”

청와대 입장에서 이런 협박은 정말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이 씨에 대해 검찰이나 경찰에 수사 요청을 하지 않았다.


광우병 사태가 전국을 휩쓸고 있는 시기에 이런 사건이 터진다는 것은 악재 중의 악재였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이런 약점을 알고 있는 이 씨는 당당하고 대범하게 행동했다.

이 씨가 청와대를 다녀간 후 청와대 측은 이명박 대통령 모르게 이 문제를 갖고 서너 차례 긴급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는 김 여사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서는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이어졌다. 일부 관계자는“적당히 돈을 주고 사건을 마무리 짓자”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 참석자들은 “돈을 준 이후에도 이 씨가 계속해서 돈을 요구하면 어떻게 하나. 돈을 받고 언론에 불어버리면 우리는 더 큰 곤경에 빠진다. 대선 후보자 시절이면 몰라도 일국의 대통령 영부인이 된 마당에 돈을 주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청와대 측은 다수 의견에 따라 이 사건을 청와대 하명사건을 담당하는 경찰청 특수수사대에 넘겼다. 사건을 맡은 특수수사대는 즉시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당시 경찰청 특수수사대는 김윤옥 여사를 협박한 이 씨를 미행하는 등 이 씨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김 신부를 불러 밤샘 조사를 실시했으며 뉴욕에 까지 전화를 걸어 김 신부와 친분이 있는 목사들에게도 이것저것 물어댔다. 김 신부는 조사과정에서 “임종규 기자가 모든 내막을 알고 있으니 임 기자를 불러 조사를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언론인을 불러들여 조사를 벌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위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기자가 아무리 이번 일에 많은 협조를 했다지만 기자는 역시 펜을 휘두르는 직업인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이 점은 청와대 민정수석실도 마찬가지 였다. 민정수석실 측은 기자에게 “이번 사건에 협조해줘 너무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들과의 만남만은 회피했다. 

한번은 그들이 청와대 인근 내자호텔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 놓고는 만남 20분 전에 전화를 걸어 와 약속을 전격취소하기도 했다. 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부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만큼 한나라당, 청와대, 경찰 모두 다 언론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일이 언론에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조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찰청 특수수사대의 수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이순례 씨에 대해서는 미행과 감청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씨가 한국에 도착하면 인천공항에서부터 미행이 이뤄졌으면 이 씨가 만나는 사람의 차량은 모두 조회가 됐다.


이 무렵 이 씨와 서울에서 만났던 박두복 전 재미뉴저지대한체육회장은 “경찰에서 이 씨와 어떤 관계냐고 묻는 전화가 와 깜짝 놀랐다”며 “경찰이 내가 탄 차량의 차적 조회를 통해 내 연락처를 알아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신부에 대해서도 감청이 이뤄졌다. 


김 신부와 기자가 나눈 자세한 대화내용을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알고 있었으며 다음날에는 한나라당 B 의원이 자세한 대화내용을 묻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김 신부에 대한 감청은 이명박 정권 출범이후 시작됐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에서는 민정수석실이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대통령 친인척 및 가까운 지인 관리는 민정수석실에서 해 왔다. 


김용걸 신부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던 까닭에 민정수석실 관리대상에 올랐다. 당시 김 신부처럼 민정수석실에서 관리하던 대통령 친인척 및 지인은 2백명 가량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1천명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명박 정권의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김용걸 성공회 신부를 특별관리대상에 포함 시키고 감청을 실시했다. 사진은 김윤옥 여사에게 뇌물성 명품가방을 전달한 이순례 씨.




김 신부의 전화가 감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기자는 김 신부와의 전화통화에 더욱 신중했다. 또한 이순례 씨를 미행하고 감시하는 수사관들에게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이 씨와의 전화 접촉과 만남을 단절해 버렸다. 이러자 이 씨는 기자에게 이메일로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경찰청 특수수사대가 아무리 수사를 해도 이 씨를 체포해 영부인 협박혐의로 검찰에 넘기기는 쉽지 않았다. 검찰에는 검찰청 출입기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이 씨에 대해 그냥 감시만 할 뿐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이 무렵 뉴욕의 보석상을 정리한 이 씨는 서울에 상주하며 김 여사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언론에 사건을 터뜨리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다. 그야말로 청와대, 한나라당, 경찰은 이 씨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전전긍긍(戰戰兢兢)에 진퇴양난(進退兩難)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이런 와중에 상황이 반전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순례 씨가 사기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씨의 지인들은 이 씨가 자신들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였다며 서울의 한 경찰서에 그녀를 고소했다. 고소내용은 이 씨가 뉴욕에서 갖고 간 싸구려 보석을 서울의 지인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비싼 값에 팔았다는 것이었다. 


확인 결과 이 씨는 1천∼3천 달러 상당의 보석을 피해자들에게 1만∼1만 2천 달러에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무렵 뉴욕에서도 이 씨에게 피해를 당했다며 신혼부부를 비롯한 몇몇 한인들이 본지에 제보 전화를 해왔다. 이 씨의 행적을 감시하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는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이 씨의 결정적 약점을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당시 특수수사대는 이 씨와 거래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신 사기혐의로 감옥에 갈래? 아니면 영부인 협박 가방사건에서 손을 뗄래?”

결국 이 씨는 이 고소사건으로 인해 이후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아마 경찰 측이 이 씨에게 겁도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이 씨로서는 출국금지 조치만 당해도 타격이 크다.


하지만 교도소행은 얘기가 또 다르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이 씨가 겁을 잔뜩 집어 먹은 것은 정황상 분명하다. 하지만 경찰과 이 씨 간의 구체적 거래 내용은 아무도 알지를 못한다. 그렇게 열심히 김윤옥 여사를 협박하던 이 씨도, 그렇게 열심히 이 씨를 미행하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도 이후 모든 일을 중단했다. 


결국 이 사건은 이명박 정권이 끝날 때까지 비밀 속에 묻히고 말았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닫은 까닭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 여사가 이 씨에게 돈을 건넨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지금도 이명박 전 대통령 측근들은 그때 이 씨에 대한 사기혐의 고소를 두고 “하늘이 도운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후 이 사건을 막으려고 진두지휘했던 A 의원은 현재 세상을 떠난 상태이고, B 의원은 정계를 은퇴했다. 또한 당시 공기업 임원을 맡고 있던 대통령 측근들은 모두 야인으로 돌아간 상태이며 민정수석실 관계자들 역시 모두 청와대를 떠났다.


다만 이 사건을 모르는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문제의 김용걸 신부를 민주평통 고위직(중앙운영위원)에 임명하는 ‘바보짓’을 했다. 김용걸 신부는 이명박 정권 기간 대부분을 서울에서 거주하며 정권 언저리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문제의 김용걸 성공회 신부. 그는 이명박 정권 내내 잡음을 일으켰다.




이후 김 신부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한 자리를 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이명박 측근으로 정권 내에서 골치 아파했던 사람’이란 낙인이 찍혀있었다. 한 때 세도가 당당했던 그는 이후 뉴욕평통의 평위원 선정에서 조차 탈락하는 쓴맛을 봐야만 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C 씨는 몇 년 전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청와대 관계자들끼리 만나면 뉴욕한인들 욕하기에 바빴다. 그들이 우리를 커다란 곤경에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어떤 여성 비서관은 ‘뉴욕 사람들 왜 그래요?’라며 분해서 눈물까지 흘리더라. 미꾸라지들이 흙탕물을 만든 격이었다. 물론 김여사가 가방을 받은 것은 큰 실수였지만 분명히 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배달사고를 낸 사람이나 이를 이용해 협박한 사람이나 당시 정권에는 ‘독(毒)’같은 존재였다. 아마 당시 광우병 사태만 아니었다면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보고하고 모두 감옥에 보냈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통령과 영부인간의 부부싸움은 심하게 벌어졌겠지만


대통령 영부인 협박사건에 본의 아니게 개입하게 된 기자는 이로 인해 중요한 작업을 하지 못했음을 아직도 아쉽게 생각한다. 'PD수첩'팀과의 공조를 통해 D선교회의 비리를 낱낱이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우병 사태의 여파로 'PD수첩' 팀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들은 한동안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 무렵 기자가 영부인 협박사건과 광우병 사태 등을 통해 들여다 본 이명박 정권은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했으며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점을 자주 보여줬다. 


특히 영부인 협박사건은 대통령 측근임을 빙자한 한 종교인과 그를 이용해 정권에 청탁하려 했던 한 여인의 ‘그릇된 만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들로 인해 이명박 정권 내내 ‘뉴욕한인 주의령’이 정권 관계자들 사이에 내려졌던 점을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편 사건 당사자인 김용걸 신부는 2022년 현재 뉴욕에서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으며, 이순례 씨는 개신교 선교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들이 과거 사건에 대해 반성하거나 후회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려 오지 않고 있다.  


임종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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