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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뉴욕서 김환기 50주기 특별전 개막 이지헌 연합뉴스 뉴욕특파원 2024-05-06 11:52:27

5월 2일부터 6월 13일까지 맨해튼 한국문화원 신청사에서 '환기 인 뉴욕' 열려




       지난 2일 뉴욕 맨해튼의 뉴욕한국문화원 신청사에서 개막한 김환기 50주기 특별전 '환기 인 뉴욕' 전시장 모습.



"오늘 봄이 시작된다. 해는 나도 바람이 거세다. 향(鄕)과 센트럴파크를 건너서 구겐하임에 가다" (1971년 3월 21일 일기) 


지난 2일 뉴욕 맨해튼의 뉴욕한국문화원 신청사에서 개막한 추상 미술의 거장 김환기(1913∼1974) 50주기 특별전 '환기 인 뉴욕'은 그의 뉴욕 시절 삶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의미 있는 전시회다.


환기미술관에서 직접 선정한 1963∼1974년 뉴욕 시기 대표작품, 그중에서도 특히 종이에 그린 작품들이 중심을 이뤘다. 뉴욕 시절 매일 쓴 일기와 편지, 그리고 뉴욕의 지인들이 소장한 미공개 작품들도 함께 전시됐다. 그는 뉴욕 시절 한동안 캔버스 대신 뉴욕타임스 신문지 위에 유채로 그림을 그렸다.


한국 미술계에서 이미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었던 그는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돼 50세의 나이에 뉴욕으로 건너왔다. 한국에서 누리던 명예와 지위를 모두 뒤로 하고 도착한 뉴욕에서, 그는 동양에서 온 가진 것 하나 없는 무명 화가나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어쩐지 뒤숭숭해서 거리에 나갔지. 우연히 레이먼드라는 화가를 만났어. 내 스케치북을 보였더니 경이적인 태도였어. 너무 동양적인가? 물었더니 그렇지 않대. (중략) 가다가 진지하게 내 그림을 보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기쁘고 용기가 나요" (1963년 12월 11일 작가의 일기) 


1963년 도착해 1974년 향년 6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1년간 그가 줄곧 머문 곳은 뉴욕이었다. 소호의 갤러리를 누비며 뉴욕의 전위적인 미술계를 접하면서도 그는 고향 신안 앞바다 빛깔을 늘 떠올렸다.



                   김환기 작 '29-I-68 IIII'(1968), 신문지에 유채.



뉴욕한국문화원 조희성 큐레이터는 "뉴욕은 김환기에게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라며 "작품 시기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완전한 추상 작업이 이때 시작됐다"라고 설명했다.


전시가 열리는 맨해튼 32가 뉴욕한국문화원 신청사는 지난 2월 처음 문을 열었다. 뉴욕문화원은 신청사가 완공되기 오래전부터 이번 김환기 전을 개관 기념전으로 기획해왔다고 한다. 전시는 6월 13일까지다. 


이지헌 연합뉴스 뉴욕특파원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는 누구?



             생전의 김환기 화백.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수화(樹話). 전라남도 진도군 기좌면 읍동(현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태어났다. 1931년 19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로 밀항하여 긴조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1년만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4월에 다시 도쿄의 니혼대학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였고, 전위를 표방하는 미술단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참여한다. 


후지타 츠구하루의 주도하에 길진섭, 김병기와 함께 활동했다. 여기서 같이 다니던 길진섭, 다시카미 다케나, 간노 유이코, 후나코시 미에코와 함께 '백만회'를 조직했다. 도쿄의 화랑에서 단체전 4번, 개인전 1번을 하고 1937년 연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 교수를 역임한 김환기는 1947년 유영국·이규상과 함께 신사실파라는 미술단체를 결성, 52년에는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됐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5세부터 44세까지 5번의 전시회를 열다가 1956년 44세의 나이에 파리에서 예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니스 그리고 벨기에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프랑스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 이후 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1959년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다시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환기 작 <운월> (1963)



그는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명예상을 수상했다.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뉴욕으로 건너와 11년간 록펠러 3세가 설립한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뉴욕에 정착했다. 


여기서 김환기의 대표작인 전면점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다.

김환기는 평소 작품을 그릴때 꼿꼿하게 선 채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목과 허리 통증이 심했다. 그로 인해 결국 1974년 7월 13일, 큰 수술을 받게 됐다. 수술은 잘 되었으나 다음날 새벽 병상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쳐 뇌사 상태에 빠진 후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다 7월 25일 뉴욕주 포트체스터(Port Chester) 소재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오전 9시 40분에 사망했다.  


시신은 김환기가 평소 즐겨 찾던 뉴욕주 웨스트체스트카운티 발할라(Vahalla) 산마루에 위치한 켄시코(Kensico) 묘지에 안장됐다. 조각가 한용진이 묘비를 세우고 서예가 김응현이 글씨를 썼다. 향년 61세. 김환기의 공적을 기려 11978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뉴욕을 사랑했던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은 지금 뉴욕주 웨스트체스터카운티 발할라 소재 켄시코 묘지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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