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자들 "LA 주방위군 배치, 미국이 권위주의로 가고 있다는 증거" 비판
"美 민주주의 망가지고 있다" 한목소리 ••• 맨해튼 거리 행진 후 충돌없이 마무리

14일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14일 오후 뉴욕에서는 비 내리는 날씨 속에 수만 명이 맨해튼 5번 애비뉴를 따라 남쪽으로 행진하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많은 시민은 손에 "1776년 이후 (미국에) 왕은 없다"(No Kings Since 1776)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1776년은 미국이 영국 왕정으로부터 독립한 해다.
이날 시위는 트럼프 대통령 생일이자 수도 워싱턴의 미 육군 창설 250주년 열병식 행사에 맞서 반(反)트럼프 목소리를 부각해 대비시키고자 미국 전국 각지에서 계획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한 뉴욕은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 주요 도시와 더불어 대규모 집회가 예고된 곳 중 하나였다.
뉴욕 맨해튼의 경우 지난해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가 80% 넘는 득표율을 올릴 정도로 민주당 성향이 매우 강한 지역이다. 시 당국이 연방 정부의 미등록 이민자(불법 이민자) 단속에 협조하지 않는 대표적인 '피난처 도시'이다 보니 불법 이민자 비중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14일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비 때문에 집회가 제대로 열릴 수 있을까 생각했던 기자의 예상은 지하철에서부터 빗나갔다.
토요일인 이날 오후 노 킹스 집회 집결지인 '브라이언트 파크'로 향하는 열차는 출근길처럼 만원이었고, 많은 사람의 손에 피켓이 들려 있었다.
집회 예정 시간보다 30분 앞서 도착한 브라이언트 파크 일대는 이미 시위 인파로 차도와 인도 할 것 없이 북적였다. 시위대 중에는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꽤 많았고 지팡이를 쥔 고령층도 적지 않았다. 유모차에 비닐 커버를 씌우고 행렬에 참가한 가족도 눈에 띄었다.

14일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참석자 중에는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 집회에 주로 등장하는 성조기를 든 사람들도 많았다. 이는 집회 주최 측에서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노 킹스 집회 주최 측은 "성조기는 트럼프 대통령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며 성조기를 갖고 집회에 참가할 것을 권장했다.
일부 참가자는 정치적 저항의 의미를 담아 거꾸로 된 성조기를 들기도 했다. 뒤집힌 성조기는 앞선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2020년 대선 결과를 부정한다는 의미를 담아 사용해왔다.
참가자들은 '잔혹함에 맞서 일어서라', '과두정치(Oligarchy) 반대', '민주주의는 중요하다'(Democracy Matters) 등 집에서 펜으로 그려온 듯한 다양한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그의 지지자들을 비아냥 거리는 투의 팻말도 많았다.

14일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시위대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는 34번가를 지나 뉴욕의 명물 중 하나인 플랫아이언 빌딩이 보이는 26번가에 도달하면서 순차적으로 해산했다. 집회 주최측은 이날 시위가 경찰과 충돌없이 평화롭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자원봉사 안전요원들을 행진이 진행되는 거리에 배치하기도 했다.
행진 대열 선두가 1시간쯤 걸려 26번가에 도착하자 안전요원들이 확성기로 "행진이 끝났으니 양옆 거리로 빠져나가 달라"라고 주문했다. 한 안전요원에게 추가로 모이는 집회 장소가 있느냐고 묻자 "다른 장소는 없다. 공식 집회는 끝났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부 참석자들은 아쉽다는 듯 주변 인도에 서서 팻말을 들고 선전전을 지속했고, 선두가 해산 지점에 도착한 뒤로도 행진 행렬은 오후 5시 무렵까지 2시간 더 이어졌다. 시작부터 끝까지 빗속에서 진행된 이날 뉴욕 집회는 주최 측 의도대로 경찰과 별다른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뉴욕경찰은 이날 뉴욕 시위에 약 5만명이 참석했다고 추산했다.
14일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 현장의 뉴욕경찰.
기자가 이날 만난 행진 대열 속 시위대는 모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보고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 모두 한목소리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법치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분노했다.
리스튜어트 씨는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출장차 왔다가 이날 집회에 참석했다면서 "내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멕시코만'(Gulf of Mexico)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 멕시코만을 '미국만'(Gulf of America·아메리카만)으로 바꾸는 행정명령에 서명해 멕시코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시각 디자이너인 진 힐러리 씨는 "오늘 모인 많은 사람은 지난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벌어진 연방정부의 폭력을 보고 그에 항의하려고 온 것이라 생각한다"며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과두정치 독재로 바꾸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적법절차의 원칙은 미국 사회의 기본 틀인데 사람들이 (불의에) 불복할 기회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며 "민주주의의 종말이 우려된다"라고 지적했다.
14일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 현장에서 자원봉사 안전요원들이 시위대 안전을 위해 길을 막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토니라고만 밝힌 한 참가자도 연방정부가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은 채 이민자들을 잔혹하게 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노 게슈타포(독일 나치 비밀경찰 반대), 노 굴락(러시아 강제수용소 반대), 이민자에게 권리를'이라고 적힌 구호 팻말을 들어 보이며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LA에 주 방위군을 보낸 것은 헌법 질서가 무너지고 미국이 권위주의로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비판했다.
자신을 뉴욕의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라고만 소개한 한 여성은 집회 참가 이유를 묻는 기자 말에 한참을 망설이더니 "한마디로 법치가 무너지고 있는 게 가장 우려되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리하게 이뤄지고 있는 이민자 단속 과정을 지적하며 "대낮의 거리에서 영장도, 신분증 제시도 없이 버젓이 납치가 벌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글•사진=이지헌 연합뉴스 뉴욕특파원
14일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 현장에서 토니 씨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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