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이후락, 차지철 이어 박종규까지 부정축재 사실 드러나
박정희 대통령 가족이 청와대에 입성한 직후 찍은 사진. 돈 문제 있어 박 대통령과 그의 가족은 사심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돈 문제에 있어 결국 박정희만
깨끗했을 뿐 측근들은 달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은 측근들의 비리를 과연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비리를 눈감아줬다면 박정희에게도 문제가 많은 것이고, 정권실세들이 대통령 몰래 거액의 ‘나랏돈’을 빼돌렸다면 지하의 박정희가 분노에 치를 떨지 모를 일이다. 돈 문제에 있어 결국 박정희와 그의 가족들만 깨끗했을 뿐이란 사실이 본지 취재결과 다시 한번 확인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서거(逝去) 이후 수많은 언론과 정적(政敵)들이 수십 년 동안 그의 비자금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스위스 개인계좌설’ 따위는 허구에 불과했다. 스위스 계좌에 거액의 박정희 개인 돈이 있다면 지금 그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근혜)이 대구시 달성군 자택을 타인에게 돈을 빌려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2022년 12월 현재 박근혜는 자택 구입비를 아직 갚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는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아버지의 스위스은행 계좌설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며 강력 부인해 왔다. 하지만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은 1978년 10월 연방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보고서에 담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6대)의 차남 이동훈(1948년생)씨의 발언내용을 근거로 ‘박정희 비자금 스위스 계좌설’을 지금까지 펼치고 있다.
당시 보고서에는 이동훈 씨가 “아버지가 ‘스위스 계좌에 1억 달러의 박정희 대통령 비자금이 있으며 내가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명기돼 있다. 그러나 정황상 이 돈은 박정희의 개인돈이 아닌 '통치자금'일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가 대통령 재임시절 부를 축적한 적이 없는데다 자녀들 역시 현재 별다른 재산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정축재의 대명사인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와는 완전 다른 얘기인 셈이다. 오히려 박정희 사후(死後) 이후락(2009년 사망)이 이 돈을 빼내 간 정황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으로 봐 이 돈은 박정희 돈이 아닌 이후락의 비자금일 수도 있다.
만약 박정희의 비자금을 몰래 빼내 자기 돈으로 만들었다면 이후락은 희대의 절도범이다. 아니면 그는 '주인 없는 돈이니 아무나 먹으면 임자'라고 생각 했을까. 아무튼 이후락과 가족들은 70, 80년대 미국에 온 이후 별다른 경제활동도 없이 수천만 달러의 재산을 갖고 뉴저지 최고의 부촌인 알파인(Alpine)의 저택에 살고 있다.
이는 이후락이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등에 재임하면서 기업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챙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속칭 '박정희 비자금'이라는 부르는 스위스 계좌의 거액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이후락 가족의 현재 재산은 5천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09년 10월 31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그는 뉴욕일원에 5천만 달러 이상을 부정축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관계자는 “이동훈의 말대로 이후락이 정말 박정희의 비자금을 관리했다면, 이후락 가족이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운 박근혜의 주택구입비라도 도와주는 것이 도리”라며 “돈 문제에 있어 박정희만큼 사욕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락 가족들은 현재 알파인 주택을 비롯 뉴욕시 맨해튼과 퀸즈의 대형빌딩, 뉴저지 에지워터의 대지와 주택 등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주의 재산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 역시 “뉴욕일원 이후락 가족의 재산은 대략 5천만 달러 이상 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타 지역 재산까지 합치면 규모를 알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들은 “지금 거주 하는 알파인 주택의 가격만도 5백만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정희는 대통령 재임시절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해 온 사람으로 유명하다. 세상을 떠나던 날 밤에도 시신을 검안한 의사가 대통령이란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그의 옷차림은 허름했다. 싸구려 양복, 낡은 구두, 헤진 허리띠, 구멍 난 속옷... 이는 박정희가 생애 최후의 날 걸쳤던 것들이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역시 박정희의 숨겨진 재산이 궁금해 수사관들을 시켜 샅샅이 뒤졌으나 집무실 금고에서 나온 9억5천만 원이 전부였고 스위스은행 계좌 목록이나 금괴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전두환은 박근혜를 불러 6억1천만 원을 전했으며, 2억 원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5천만 원은 노재현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전달했다. 나머지 1억 원은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비로 사용했다. 박정희와 관련한 돈 이야기는 이 것 외에 특별한 내용이 없다. 그러나 그의 측근들은 너무나 달랐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정인숙 사건 등 여자문제로 속을 썩힌 것을 비롯 김형욱 제4대 중앙정보부장(이하 김형욱)의 미국 망명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박정희는 김형욱이 거액을 빼돌린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미국 정치권과 언론에까지 그의 재산이 공개 됐을 정도니까 말이다.
프레이저위원회가 78년 10월 말 활동을 마치며 발간한 ‘한미관계조사보고서’(일명 프레이저보고서)에 따르면 처음에 김형욱은 2백60만 달러를 미국으로 가져왔고 그 절반을 도박으로 날렸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씨티은행은 미국과 해외계좌에 있는 그의 재산 총액이 1천5백만~2천만 달러(현재 화폐가치 2억 달러)로 추정된다는 자료를 위원회에 제출했다. 김형욱의 재산 빼돌리기 역시 이후락과 쌍벽을 이룬다.
김형욱이 70년대 미국으로 빼돌린 재산은 프레이저 위원회 추정치 보다 많은 2천5백만 달러가량으로 추산된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한 1973년,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10억3천4백만 달러 였으니 그가 얼마나 매국행위를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한인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 김형욱 가족의 미국내 재산 역시 5천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김형욱의 배신과 매국행위에 당시 박정희는 치를 떨었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한국으로 유인해 죄 값을 치르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김형욱은 박정희의 회유를 거절했다. 이에 박정희는 더욱 더 분을 삭힐 수가 없었다. 박정희가 김형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재규(제8대 중앙정보부장)가 프랑스 파리에 주재하는 중정요원에게 모종의 '오더(Order)'를 내렸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김형욱은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로 유인돼 중앙정보부 요원 2명에 의해 암살당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암살 당하기 19일 전의 일이었다. 김형욱 암살은 박정희에 대한 김재규의 마지막 충성이었던 셈이다.
1977년 6월 연방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모습.
뉴저지 잉글우드 소재 브룩사이드 공동묘지에 2005년 조성된 김형욱의 가묘.
박정희는 김형욱만 미국으로
'나랏돈'을 빼돌린 줄 알았다.
박정희는 김형욱만 거액의 나랏돈을 미국으로 빼돌린 줄 알았던 것 같다. 이후락에 이어 차지철, 박종규 경호실장 등이 뉴욕, 뉴저지로 돈을 빼 돌린 사실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알았다면 박정희의 성격상 이들을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 A 씨(뉴저지 거주)는 기자에게 “그 때는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이 나라의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까닭에 수장(首長)들의 비리를 대통령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A 씨는 “비리보고를 대통령에게 해야 할 사람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있으니 박정희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 후 “부총리급(중앙정보부장), 장관급(경호실장) 실세들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고 전했다.
이어 A 씨는 “나라 위해 애쓰다 61세에 세상을 떠난 박정희만 불쌍하다”며 “자신의 ‘보스’는 화장실의 물까지 아끼며 근검절약하는데 실세라는 인간들은 혈세(血稅) 빼돌리기에 급급했다”고 강조했다.
“왜 하필 그 많은 나라 중에 뉴욕으로 재산도피를 했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A 씨는 “첫째 뉴욕이라는 도시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뉴욕에 자신들을 도와 줄 한인(친척, 지인 등)들이 많이 거주한다는 점이다.
한인 변호사, 회계사, 사업가 등 돈만 주면 자신들을 도와 줄 동족이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아무리 부정한 돈을 많이 빼돌려도 미국정부는 그 돈을 해당국가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는 한번 국내로 들어온 돈은 아무리 해당국가가 반환을 요구해도 강제로 되돌려 보내는 법이 없다. 미국에 한국의 ‘검은돈’만 들어와 있겠는가? 당시 정권 실세들이 이 같은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른쪽부터)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전두환 작전차장보, 노태우 행정차장보.
차지철이 빼돌린 돈으로 처가와
세 딸은 뉴욕에서 호화롭게 살아
김형욱, 이후락의 가족들이 한국인들의 혈세를 갖고 지금도 여유롭게 살 듯 차지철 경호실장(이하 차지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차지철의 뉴욕 재산도피는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간 본지를 비롯한 극히 일부언론만 관심 있게 추적보도 했을 뿐 대다수의 한국 언론들은 이 부분에 대해 취재정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차지철은 6,7,8,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4선 의원 출신이다. 차지철 가족과 친분이 있다는 B 씨(뉴욕 거주)는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致富)를 한 것은 의원 시절보다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경호실장 때”라며 “특히 기업들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차지철은 1974년 8월부터 약 5년간 제3대 경호실장에 재임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뉴욕으로 거액을 빼돌렸다.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빼돌린 돈을 관리하는 큰처남 윤세웅(82·전직 의사.목사)씨의 재산규모로 봐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윤 씨는 뉴욕일원과 펜실베이니아 등지에 저택과 다수의 부동산, 방송국 등을 소유하고 있는 거부(巨富)이다. 1964년 2월 26일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윤 씨가 1976년 3월 5일 미국에서 의사면허를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차지철의 경호실장 재임시절, 이미 재산도피를 모의하고 미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10.26 사태로 차지철이 죽자 전두환은 지난 1981년 차지철의 부인 윤보영 씨(1997년 사망·당시 50세)와 세 딸(크리스틴, 다이애나, 주디 차)을 뉴욕의 오빠 윤세웅 씨에게 보냈다. 뉴욕에 온 윤보영 씨는 친정부모와 오빠 이름으로 80년대에만 무려 8채의 건물을 매입했다.
자신 이름으로 매입한 부동산까지 합치면 윤 씨는 모두 10건의 부동산을 매입했다. 대부분이 뉴욕시 퀸즈 요지의 건물들이었다. 당시 윤 씨는 액수를 추정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을 부동산 매입에 쏟아 부었다. 1997년 윤 씨 사망 후 한국과 미국 재산 대부분은 세 딸에게 상속됐다. 이후 그녀들은 아버지가 빼돌린 재산을 갖고 지금까지 미국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 년 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윤세웅 씨는 “내가 일부 언론에 차 실장의 작은 처남으로 소개됐는데 이는 오보”라면서 “사실은 내가 큰 처남”이라고 말했다. 차지철 재산관리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윤 씨는 오보를 낸 언론인만 비난 할 뿐 차명재산 관리에 대해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윤 씨의 지인 B 씨(목사)는 “윤 씨의 부동산 재산만 6천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재산형성과정에 대해선 그가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윤 씨가 비뇨기과 의사 수입만으로는 그 만큼의 부를 축적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활동하던 시기의 박종규(오른쪽).
1984년 IOC 총회에 참가한 당시 노태우 대한체육회장, 박종규 IOC 위원(오른쪽에서 두번째), 이영호 체육부장관이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박종규 전 경호실장은 체육계의 저명인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박종규 사망으로 차명재산
관리하던 뉴욕 측근만 횡재
뉴욕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모(68) 씨의 주변 인물들은 오래 전부터 그의 재산형성과정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별다른 직장생활도 하지 않고 평생을 체육인으로 살아 온 그가 어떻게 해서 3∼4개의 사업체와 수채의 자기 건물을 갖게 됐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씨를 잘 아는 또래 지인들의 의구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이들은 기자를 만나 이 같은 사실을 전하며 “이 씨의 재산형성 과정을 추적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자 역시 그의 재산형성 과정에 의문을 갖고 있던 터라 곳곳을 취재하고 다녔지만 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 씨의 90대 아버지 역시 한국에서 오랫동안 체육계에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 개월 동안 이 씨의 아버지 과거를 추적하다보니 박종규(1930년 5월 28일~1985년 12월 3일)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하 박종규)의 이름이 등장했다. 박종규는 세간에 군인이나 경호실장 출신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체육계에서는 체육인으로 더 유명 하다.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격을 좋아했던 그는 1970년 대한사격연맹 총재와 아시아사격연맹 총재를 지냈다.
1979년에는 국제사격연합회 부회장으로까지 취임했다. 또 1978년에는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유치를 하는데 앞장섰으며, 1979년 2월 15일 제25대 대한체육회 회장이 되어 올림픽유치에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그는 정부로부터 체육훈장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마산·진해·창원 지역구에서 제10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1980년 신군부 등장이후 이후 김종필, 이후락 등과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해 6월 18일 계엄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박종규의 부정축재액은 77억3천3백42만원이었다. 박종규는 1984년 국제올림픽의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1년 뒤인 1985년 12월 3일 간암으로 사망했다.
박종규의 이력을 살려보면 그가 박정희 정권의 실세 역할 뿐만 아니라 체육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주목 할 사항은 신군부가 발표한 그의 부정축재 재산액이다. 당시 77억원이면 지금으로서는 7백억원이 넘는 돈이다. 박정희와 함께 5.16 혁명을 하고 1974년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 때까지 청와대 경호실장을 했던 그가 어떻게 해서 거액의 재산을 모으게 됐을까. 또한 그는 경남대학교도 소유하고 있었다.
정권실세였던 그 역시 엄청난 축재(蓄財)를 한 것이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이후락, 김형욱, 차지철의 사례와 견주어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 부분이다. 박종규는 체육인으로 활동하면서 뉴욕의 이 씨와 돈독한 친분을 쌓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면서 박종규는 이 씨를 통해 뉴욕으로 거액을 빼돌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 씨 이름으로 차명재산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한국의 80대 전직 체육인 C 씨는 “박종규가 이 씨 이름으로 뉴욕에 차명 부동산 구입을 매입했다는 사실은 최측근만 아는 비밀”이라면서“박종규 사망 후 뉴욕 재산은 모두 이 씨 소유가 됐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박종규의 차명재산은 그의 사망 후 서류상 소유자인 이 씨의 것이 되었으며, 이 씨가 90대 고령이 되면서 60대 아들에게 상속됐다는 얘기이다. 결국 유도선수 생활을 했던 아들 이 씨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박종규의 재산을 얻게 된 셈이다. 박종규가 차명으로 구입한 건물은 정확히 몇 채인지 알 수가 없다. 박종규는 세상을 떠났고, 고령의 이 씨는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인들은 아들 이 씨가 자신이 직접 경영하는 업체 외에도 뉴욕시 브루클린 등지에 최소 3∼4채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은 이 씨의 재산을 2천만 달러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박종규가 빼돌린 재산 덕분에 현재 이 씨는 재력가로 행세하며 뉴욕한인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어 있다.
그는 지인들에게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있다. 이 씨를 잘 안다는 체육단체 관계자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있어 이 씨의 경우는 맥 빠지게 만드는 얘기”라며 “땀 흘려 돈을 버는 이민자들이 대다수인 한인사회에서 부정 축재한 돈으로 사업을 하는 이 씨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다시는 한국의 부정한 돈이 미국에 흘러 들어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선 한국 사회가 대통령이나 정권실세들의 재산도피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임종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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